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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능시험이 있는 날, 김진숙 민노총 지도위원이 크레인 농성 309일 만에 농성을 풀고 땅으로 내려왔소. 한진중공업 노사잠정 합의안이 노조원 총회에서 가결되어 문제가 해결된 것이오. 여기에 얽힌 자세한 내용은 설명할 자신이 없소. 김진숙의 행위에 대한 입장도 서로 다를 것이오. 서로 다른 입장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밤을 새워도 결론이 나지 않소.
나는 두 가지만 말하고 싶소. 첫째, 그가 큰 사고 없이 크레인에서 내려온 것이 기쁘오.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게 되었소.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소. 둘째, 앞으로 이런 자학적인 방식으로 투쟁하지 않아도 노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소. 이를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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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 위에서 트위터는 어떤 존재였나?
"예전에 교도소 독방에 수감된 적이 있다. 한달쯤 지나니까 말을 못하겠더라. 신문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크레인에 처음 올라갔을 때 휴대전화만 썼는데, 어느날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계좌번호'라는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책과 사람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올라간 크레인에서 2003년 목을 맸던 김주익 열사도 그랬을 것 같았다. 이때 황씨가 아이폰을 올려주며 권유했다. 트위터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 트위터는 내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또 트위터가 희망버스를 움직였다. 트위터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말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자살 유혹은 없었나?
"솔직히 여러 번 있었다. 주익씨는 무던하고 늘 웃었다. 호인이었다. 그분의 장례식장에 갔는데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장례식장에 온 것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 인품이 됐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주익씨가 129일 동안 홀로 크레인에서 농성을 하다가 자살했다. 난 당시 주익씨가 자살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내가 첫날 이곳에 올라와 보니까 그 심정이 이해가 되더라."
-언제 자살을 떠올렸나?
"내가 크레인에 올라간 1월6일 노조 간부들이 노조원들과 충돌했다. 노조 간부들이 크레인에 접근하는 노조원들을 막은 것이다. 일부에선 내가 강경 일변도의 극단적 투쟁을 해서 협상을 어렵게 한다고 비난한다는 말을 듣고는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노조 집행부가 보고대회를 크레인 아래서 하지 않고 (떨어진) 단결의 광장에서 하는 것을 보면서도 (자살) 충동을 느꼈다. 상황 변화가 없을 때도 불쑥불쑥 그런 생각(자살)이 들었다. (옆에 있던 황씨를 가리키며) 그럴 때마다 크레인 아래에 있던 황씨를 보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그에게 '절대 안 죽는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교도소 독방에 수감된 적이 있다. 한달쯤 지나니까 말을 못하겠더라. 신문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크레인에 처음 올라갔을 때 휴대전화만 썼는데, 어느날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계좌번호'라는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책과 사람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올라간 크레인에서 2003년 목을 맸던 김주익 열사도 그랬을 것 같았다. 이때 황씨가 아이폰을 올려주며 권유했다. 트위터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 트위터는 내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또 트위터가 희망버스를 움직였다. 트위터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말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자살 유혹은 없었나?
"솔직히 여러 번 있었다. 주익씨는 무던하고 늘 웃었다. 호인이었다. 그분의 장례식장에 갔는데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장례식장에 온 것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 인품이 됐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주익씨가 129일 동안 홀로 크레인에서 농성을 하다가 자살했다. 난 당시 주익씨가 자살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내가 첫날 이곳에 올라와 보니까 그 심정이 이해가 되더라."
-언제 자살을 떠올렸나?
"내가 크레인에 올라간 1월6일 노조 간부들이 노조원들과 충돌했다. 노조 간부들이 크레인에 접근하는 노조원들을 막은 것이다. 일부에선 내가 강경 일변도의 극단적 투쟁을 해서 협상을 어렵게 한다고 비난한다는 말을 듣고는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노조 집행부가 보고대회를 크레인 아래서 하지 않고 (떨어진) 단결의 광장에서 하는 것을 보면서도 (자살) 충동을 느꼈다. 상황 변화가 없을 때도 불쑥불쑥 그런 생각(자살)이 들었다. (옆에 있던 황씨를 가리키며) 그럴 때마다 크레인 아래에 있던 황씨를 보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그에게 '절대 안 죽는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 앞선 사람들의 죽음에 이르는 선례를 따를까 걱정이었습니다.
밑에 있던 사람들의 SNS나 희망버스 등 지속적이고 색다른 운동방식에 많은 힘을 얻고
매스컴과 사주들이 묵인할 수 없는 주목을 받게 된 결과인 것 같습니다.
생명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말씀이 계속 생각나는군요.
아래는 세계적인 낙서가(?) 퍼잡스키가 85크레인의 사태를 그린 작품입니다.
아래의 WE, 위의 S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