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대 한국교회의 가장 긴급한 문제는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아사상태로 스러져 가는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보다 더 절박하고 중대한 현안은 없다. 눈을 들어 현실을 보라. 수많은 교회들이 죽어가고 있다. 생존의 기로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버텨내고 있는 교회들이 태반이다. 최근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전체 교회 5만 3천 개 중 93%에 해당하는 4만 9192개가 소형교회로 나타났다. 그중에 대부분은 자립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존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교회 중 3교회가 성공했단다. 그런데 지금은 300교회 중 1교회만 성공한단다. 정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든 상황이다. 사실이다. 한국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괴멸해가고 있는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절박한 일은 없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을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긴급하고도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 생태계 복원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한 방책

그렇다면 교회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성경적인 방책은 과연 무엇일까? 필자는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한 작은 교회를 선택하는 신앙적 결단을 하면 된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교회 선택이 쌓이고 쌓여서 교회 생태계를 황폐화시켰듯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새로운 교회 선택을 하면 된다. 이미 성도로 넘쳐나는 대형 교회가 아니라 막 새순을 틔워낸 교회, 아직은 여리디 여린 새싹 같은 교회, 세월은 흘렀으나 대형교회의 그늘에 가려 자라지 못한 교회를 선택하면 교회 생태계는 복원된다. 무조건 크기가 작은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니다. 건강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부분적인 복음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을 정직하게 전하는 교회,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운영하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조정해가는 교회,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러 가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규모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책보다 더 평화롭고, 더 지혜롭고, 더 효과적인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성급한 눈으로 보기에는 그 효과가 미미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인내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견딘다면 교회의 생태계는 이내 곧 회복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교회 선택이 교회의 생태계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것을 생각해보라. 누구도 이처럼 교회 생태계가 괴멸 위기에 빠질 줄을 몰랐지만 결국 세월이 쌓이면서 그렇게 되었지 않은가. 한 사람의 선택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교회 양극화를 가져왔지 않은가. 교회 생태계 회복도 마찬가지다. 지나온 길을 정반대로 가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한 작은 교회를 선택하면 된다. 그러면 교회 생태계는 반드시 살아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심하게 몇몇 대형교회를 선택한다면, 교회의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고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복지만을 생각한다면, 교회 생태계는 사막화라는 대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무성한 대형교회마저도 얼마 안 되어 동맥 경화로 자멸하게 될 것이다.

둘째, 대형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교회 생태계를 황폐화시킨 죄악을 회개하고, 회심의 표징으로서 작은 교회로 흩어지는 위대한 순종을 하면 된다. 교회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 책임을 통감하고 가슴만 쳐서는 안 된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스러져가고 있는 연약한 교회로 성도들이 대거 흩어져야 한다. 평안한 안주와 복된 누림에서 거친 광야와 섬김의 길로 흩어져야 한다. 평안하고 복된 교회, 헌신의 땀방울이 흥건하게 배어 있는 교회, 깊고 끈끈한 정이 눌어붙은 교회를 박차고 떠나야 한다. 목회자도 떠나야 하고, 그리스도인들도 떠나야 한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친척과 고향을 떠났던 아브람처럼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떠나야 한다. 그러면 교회 생태계는 다시금 복원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급속도로.

아주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일천 명이 넘는 교회의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가급적 많이 떠났으면 좋겠다. 교인수가 일천 명이 넘으면 교회는 어쩔 수 없이 경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격적인 소통과 진실은 줄어들게 되고, 상명하복의 경직성과 권력의 서열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교회의 본질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DNA를 잃을 수밖에 없게 된다. 더욱이 일청 명이 넘어가게 되면 작은 교회를 잡아먹는 포식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된다. 이것은 목회자의 인격이나 능력으로 극복되는 게 아니다. 아마 예수님도 규모의 정치학, 규모의 경제학이 낳는 여러 폐해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교회 구성원을 일천 명 이내로 줄이는 믿음의 결단을 하는 것이 좋다.

일례로 사랑의 교회를 생각해보자. 4만 명이 넘는 사랑의 교회는 그동안 시설의 태부족으로 인해 심히 부대껴왔다. 하여, 지난 해 2,100억이 소요되는 새 예배당 건축을 결정했다. 사랑의 교회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천문학적인 돈이 소요되는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는 대신 수용 가능한 인원만 남기고 지역 교회로 흩어지게 했다면 어땠을까? 2,100억을 들여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헌금 작정까지 했다가 건축 계획을 포기하고, 작정한 헌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새로운 결정을 했다면 어땠을까? 거대한 초현대식 교회 건축으로 사랑의 교회가 장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기여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은 기여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한국교회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획기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굳게 닫혔던 전도의 문이 새롭게 열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사랑의 교회도 살고 교회 생태계도 살리는 위대한 축복이 되지 않을까? 필자는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것은 이상론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필자 또한 교회의 현실을 볼 때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여,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그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일이 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교회의 일상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본질을 생각한다면,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지상식민지라면,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면, 자본주의적 욕망의 극치인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이 교회 안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 대형교회가 작은 교회를 잡아먹는 양극화의 재앙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수치요 사악한 죄악이기 때문에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양극화의 수렁에 빠져 있다. 능력 있는 놈은 살아남고, 능력 없는 놈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한 자본주의의 경쟁 논리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횡횡하고 있고, 교회 생태계를 파괴한 대가로 대형교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가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자랑하며 기뻐하는 천박한 졸부 근성에 붙잡혀 있다. 하여, 필자는 교회의 일상이어야 하는 일을 기적처럼 고대하고 있다.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기대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도 주님의 교회이니까. 그래도 주님의 사람들이니까.

셋째, 생존에 허덕이는 작은 교회들이 서로 의기투합해서 적절하게 통폐합을 하면 된다. 지금과 같이 교회가 난립하는 것은 목회자와 성도에게도 유익하지 않고, 한국교회 생태계에도 유익하지 않다. 재정이 열악한 교회들이 저마다 월세와 경상비를 부담하며 난립해 있는 것은 우선 경제적으로 낭비이고, 담임목사 혼자 모든 사역을 감당하는 데에서 오는 폐해와 한계들 또한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 두 세 교회가 하나로 통폐합을 하면, 일단 월세와 경상비를 3분의 1로 줄일 수 있고, 목회 사역도 통폐합한 목회자들이 은사에 따라 분담하면 전문성을 살릴 수 있어서 좋다. 교회의 인적 규모도 어느 정도는 커지기 때문에 목회자와 성도 모두 탈진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된다.

물론 몇몇 교회가 통폐합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리더십의 질서를 세우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고, 신앙의 색깔을 조율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또 교회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워졌다는 확신이 강하기 때문에 교회를 통폐합하는 것 자체를 인간적인 일이라며 거부할 수도 있다. 사실 교회를 통폐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인 장애물과 신앙적인 장애물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자립 교회는 통폐합되어야 한다. 순결한 마음과 뱀 같은 지혜를 동원하여 통폐합의 묘수를 찾아내야 한다.

모든 교회들이 지금처럼 제각각 자기 길을 고집하는 것은 백 번을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이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 우리 안에는 이런 믿음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졌다는 믿음,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 주님이 문을 닫으실 때까지는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이 믿음이 과연 제대로 된 믿음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교회를 마지막까지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마16:18)은 우주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지 개교회를 가리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번지수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번지수가 틀린 믿음으로 우리는 오늘의 교회 난립을 자초했고 통폐합조차 가로막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미자립 교회가 통폐합하는 것은 하나 되어 서로를 섬기라는 주님의 뜻에도 부합할 뿐 아니라,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는 매우 성숙한 믿음의 길이다. 미자립 교회는 할 수 있는 한 통폐합해야 한다.

교회 생태계 복원과 교회 선택 주권

필자는 이 세 가지 제안이 괴멸해가는 교회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성경적인 방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책을 넘어 조금은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고 싶다.

지난 10.26 보궐 선거에서 서울 시민들은 시민운동가 박원순 씨를 시장으로 당선시켰다. 물론 박원순 씨 개인과 시민의 힘만으로 당선된 것은 아니다. 안철수 교수의 통 큰 양보와 범야권 전체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민의 뜨거운 지지가 없었다면 야권 후보 단일화는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고, 범야권의 전폭적인 지원도 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판단과 지지가 결국 박원순 씨를 서울 시장으로 당선시켰고, 행정의 흐름을 바꾸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국민 주권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국민의 선택이 가진 힘의 실체를 보았다. 정당과 정치 문화, 돈의 쓰임새, 나라의 살림살이, 행정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힘의 근원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상식의 실체를 보았다.

필자는 교회 안에서도 10.26 시민 혁명과 같은 대격변이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투표라는 선택 행위를 통해 시민이 정치인과 정당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교회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 교회의 체질과 목회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교회 선택 시대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건 그리스도인에게 교회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넘어서 교회정치 주권(교회와 관련된 정치적 주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오해는 금물이다. 필자는 지금 목회자 주권 시대는 끝나고 그리스도인 주권 시대가 도래 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뿐이다. 주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교회의 주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종속된 일원’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일원’이라는 면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주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종교개혁을 생각해보자. 종교개혁의 핵심이 무엇인가? 만인 제사장주의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주의 말씀을 듣고 읽을 권리가 있고, 주님과 만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 아닌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 아닌가? 그렇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 또 하나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종속된 일원’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일원’이라는 원칙을 천명하는 새로운 종교개혁 말이다. 아니다.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교회는 선택의 대상이 되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교회 선택이 교회의 체질과 흐름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정치와 사회의 흐름을 바꿀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교회 선택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통해 교회의 체질과 목회의 흐름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종교개혁의 본질이며, 새로운 교회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지나온 20여 년 동안 ‘교회 선택 주권’을 긍정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는 쪽으로 남용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그동안 ‘교회 선택 주권’을 선하게 사용하지 못했을까?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는 쪽으로 남용했을까? 원인은 아주 단순한데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정작 ‘교회에 종속된 일원’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 선택 행위를 하면서도 개인적인 선택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책임이 뒤따르는 일인지, 교회 생태계를 황폐화시킬 수도 있는 일인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교회가 부패했다며 분노하고 신음하면서도 신학자나 목회자에게만 교회 갱신의 책임을 미뤘던 것이다. 깊은 절망에 몸부림치면서도 ‘교회에 종속된 일원’이라는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하나님 환원주의가 한 몫을 톡톡히 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진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진실이 그리스도인의 주권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교회의 미래를 하나님께만 맡기게 했다. 하나님이 하실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게 했다. 그렇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하나님 환원주의가 오늘의 교회 현실을 낳게 한 신학적 배경이다.

자, 분명히 하자.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종속된 일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구성하는 책임 있는 일원이다.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책임과 힘을 가지고 있는 교회의 일원이다. 때문에 교회의 미래를 하나님께만 맡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며 기도만 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이 하실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서도 안 된다. 변화의 희망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교회를 향해 비난만 퍼부어서도 안 된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우리에게 위임된 책임과 허락된 힘을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체질을 변화시키고,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주역으로 나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 정치에 참여하는 길이며, 우리에게 허락된 주권을 제대로 사용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주권은 일차적으로는 교회 선택권으로 나타나고, 이차적으로는 교회 안에서의 의결권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교회 선택 행위를 했으면서도, 정작 그것이 주권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교회 생태계라는 보다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고 개인적인 신앙의 유익이라는 사적인 세계에 갇혀 있었다. 하여, 소박하게 개인적인 영적 복지와 유익이라는 가치만을 위해 신성한 주권을 사용해왔다. 생각 없이 대형교회를 선택해왔고, 교회 안에서의 의결권조차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교회 정치는 목사와 장로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 결과 지금의 한국교회가 되었다. 교회의 부패는 극에 달해 있고, 교회의 생태계는 황폐화되어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주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데 있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주권을 보다 큰 가치 - 하나님나라의 의라는 가치를 위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지난 20여 년 동안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주권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죄, 개인적인 영적 안일과 만족을 위해 주권을 남용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지난날의 무지와 어둠을 제대로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문제 해결의 길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다.

교회 정치 주권을 제대로 사용하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교회 생태계가 죽을 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는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한 사람의 교회 선택이 정말 중요한 때이다. 우리는 이미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교회 선택이 교회 생태계를 괴멸의 위기로 몰아간 것을 보았다. 괴물처럼 거대한 교회의 포식성을 보았다. 하여,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적 주권을 똑바로 인식하고, 교회 선택 주권과 교회 안에서의 의결권을 책임 있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생태계를 살려내는 전략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고, 괴멸해가는 교회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다. 필자는 이것만이 교회 개혁과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복음적인 길이라고 믿는다. 평화롭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길이라고 믿는다.

사실이다. 교회의 개혁, 교회의 생태계 복원은 아주 작은 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인 신앙의 유익이라는 가치를 선택하는 대신 교회 생태계를 살리는 보다 큰 가치를 선택하는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이 작고 사소한 선택이 쌓이고 쌓여, 몇몇 교회는 유전자가 변형된 괴물이 되었고, 교회 생태계는 괴사 일보 직전까지 내몰린 것처럼, 이 작고 사소한 선택이 쌓이고 쌓이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분명히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괴사 직전인 교회 생태계는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며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