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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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마리아와 관련된 글을 읽다가 궁금증이 생겨 문의드립니다.
신학마당에 "동정녀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글을 읽고 제가 소화시키지 못할 글을 읽고 체한 듯한 생각이 자꾸듭니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진실을 알게하는 빨간약을 먹은후 겪게되는 혼란같은 당혹감이랄까요.
다들 어렸을때 교회학교를 거치는 과정에서, 흠이 없는 어린양, 즉 죄가 없는 예수님이 대속하여
인간의 죄를 대속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배웠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아니고, 요셉과의 생물학적 관계로 태어난 인간예수일 수 도 있다는 말씀이신데요...
원죄를 가진 인간은 흠이 있는 죄인인데,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예수님 만이 원죄 없이 죄를 대속할 수 있다고 교회학교에서 배웠습니다만...
이 부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게 좋을지요.
전에 올렸던 글,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적인 진리가 아니다"
정용섭목사님의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부분 중에서 해당 강의록을 올립니다.
파일첨부 합니다.
저는 위에 댓글을 다신 분들과 일치한 생각도 있지만 너무 비유적으로 생각하면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임을 나타내주는 비유라는 관점에서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사실과 진실로 받아들이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 중심사상이구요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이 더욱 더 중요할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왜 중요한지 성경에 왜 동정녀 탄생이 나와있는지를 살펴 보는 믿음의 눈이
중요할 것입니다.
신학책을 보면서 때로는 본질보다는 비본질에 관심을 둘때가 많습니다.
신학자들은 개인적인 영성에 기초를 하고 말하고 글을 쓰는 경우가 많죠
그런 글을 보면 일반적으로 신학책을 접한 평신도는
신학을 잘모르면 헷갈리고 고민을 하고 지금까지 배운것이 전부 엉터리라고
착각 하고 생각합니다.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신학자들이 고민한 과정이 있는데 우리는 결과만 보고 과정을
보지 않기에 신학자들의 고민을 따라가지 않고 해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잘못하면 엉뚱하게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이단들 처럼요
전부는 해석을 문자적으로 하면 안되지만 성경을 부분적으로
때로는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 그대로 믿는 시각도 평신도는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만들죠 ...
성서기자들이 왜 그런 표현을 하고 자기 신앙고백 차원에서 성경을
썼는가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믿음에
차원에서 볼 필요도 있을 겁니다.
성서기자는 신학수준이
바둑으로 치면 프로 9단이면 평신도는 아마1급정도도 안되는 수준이기에
성경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보수적인교회에 가르치는 것도 신학적으로 일리가 있구요
성경을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가 인문학적으로 비유적으로 비평적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도 일리가 있죠 ...모든 신학은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빨간약 드신게 절대 아닙니다.
여러 신학 학설중에 열려 있는 하나의 가설입니다.
헷갈리지 마십시요 정체성을 지키시고 참고만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본질에 충실하시면 소화가 가능합니다.
근본주의든 비평적인 신학이든 동정녀 탄생의 의미는
중심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위에 댓글을 다신 흰구름님의 신학수준은 매우 높기에
우리가 따라갈수 없지요 참고만 하십시요
보통 진실에 눈을 뜨는 과정을 매트릭스의 빨간 약에 비유하죠.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빨간 약을 먹고 난 이후에 보이는 세계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빨간 약을 먹는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빨간 약을 먹고 난 이후의 세계도 진정한 실재가 아닐 수 있거든요.
지젝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실재(reality)는 가상 시뮬레이션의 배후에 있는
어떤 현실(기계가 지배하는 세계)이 아니라 현실을 모순되게 만드는 텅빈 공간이며
매트릭스의 기능은 이러한 모순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0세기말에 매트릭스가 제기한 현실에 대한 의문에 덧붙여
21세기의 인셉션은 네가 깨어난 곳도 현실이 아닐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새롭게 깨달은 진실도 인간의 유한한 이성안에서 경험된 것이니
진리의 한 조각일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빨간 약을 드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제대로 한번 부딛쳐 보십시요.
지금까지 믿고 있던 것들을 다 열어놓고 이래도되나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펴보십시오.
그런 고민의 과정이 빨간 약을 먹는 것이며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과정이 지나면 이제 무언가 좀 알겠다 싶고 나름대로 정리가 되었다 싶을 때가 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다시 빨간 약을 떠올려야 할 때일지 모릅니다. 팽이를 한번 돌려봐야겠죠.
긴 여정이니 너무 성급하게 생각치 마시고 천천히 가시기 바랍니다.
베스트 님,
매트릭스의 빨간약이라는 표현이 재미있군요.
그렇습니다.
실체적 진실이 우리를 자유롭게도 하지만
혼란스럽게도 합니다.
자유와 혼란은 양날을 가진 칼의 모습니다.
사람들은 혼란이 두려워서 실체적 진실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결국 어떤 것에 길들여집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도 그걸 말합니다.
베스트 님이 거론한 원죄, 죄없음, 어린양, 속죄, 구원... 등등, 예수에 대한 교리는
(다음의 표현을 잘 기억하세요.)
초기 기독교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왜 일반적인 방식으로 출생하면 죄가 있고,
비정상적인 방식으로(동정녀) 출생하면 죄가 없는 걸까요?
더 근본적으로 죄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은 것이 분명하다면
(이건 영지주의와 연관해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리인데)
예수님도 죄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제가 지금 이단 시비가 될만한 발언을 하는 중입니다.
어떤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니 이해하세요.
저도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과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는 두 명제를 연결해서 생각해보세요.
부활은 이런 죄의 결과에 따르는 죽음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해체합니다.
(좀 복잡하지요?)
저의 개인적인 신학적 설명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가 거쳐온 신학적 과정을 설명하는 겁니다.
이런 과정 없이 기독교 교리가 생긴 게 아니랍니다.
질문이 끝없이 계속됩니다.
왜 인간은 죽어야 하는가?
죄는 무엇인가?
왜 아담의 책임을 후손이 져야하는가?
하나님이 창조주라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말고
말씀 한 마디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실 수 없는가?
이런 질문은 기독교 신앙을 약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풍성하게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단순히 기독교 열광주의자가 되고 말지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