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7일
언어 너머의 기도
주님, 저는 늘 말과 글로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그리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저의 말과 글을 상대해주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과 글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저의 원하는 바를 감히 당신께 간구합니다.
그러나 주님, 분명한 것은 당신은 말과 글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말과 글은 궁극적인 것을 세울 수 없다 하지 않습니까.(不立文字) 말과 글은 아무리 정교하고 진정성이 있다 해도 영적인 현실성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너무 초라합니다. 오히려 말과 글로 인해서 하나님을 인간의 사유 범주 안에 제한시킬 위험성이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이방인들의 기도였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기도 행태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주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해서 말과 글 너머의 기도를 잘 모릅니다. 말과 글이 없으면 망상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말과 글을 포기하고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기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말과 글을 뺏어 가시든지, 아니면 말과 글에 영혼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저는 한 신학자의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투박한 속내들을 재미있게 감상합니다.
그런데,'상투성','절필'이란 말씀은 목사님의 엄격한 성품에서 나온 말씀같습니다.
하나 제 의도가 아닙니다. 목사님이 안 보이면? 엘리사들은 어찌 하시려구요? 아직 안 됩니다.....):
우리 아버지들.....목사도,대통령도
권위적으로 가장하고,큰 목소리 내면서도
역사 속에서 모욕당하고 쫓겨나고,비열하고 부재하거나 바쁜 모습이 많았지요
이렇게 조곤조곤 고백하며
친구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품위있으나 겸비하게 말 거는 아버지
수 많은 교회 목자들에게서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발견한 즐거운 처소이자 매일의 양식입니다.
특별히 목사님의 설교비평은
물 몇 방울로 호스질하던 제가
탕탕히 흐르는 강물을
불현듯 발견한듯
저 너머 무지개를 찾아 나선 어린 아이같은 제게
예기치 않게 나타난
제 일생에서 손 꼽는 경이요 치열한 문장의 세계입니다
무사의 결전은 장엄하고 비장했고
세기적 전장터의 기록으로
길이 길이
말해질 것입니다.
누군가 싸우고, 외치길 바라며
그분이 하마 오실까 우리가 기다린 분이
목사님이었다면
여전히
우리 곁에서 하소연도 하시고
욕도 하시고, 눈물도
방귀도 날리는 그런 분인 것이
영남에 계신 것이
더 고맙고
더 친근하고
더 즐겁고
자랑스럽습니다.
고고하고 서늘한 신학 일가를 이루기까지
무수한 죽음과 상흔과 영광을 지나오면서
여리고 순한 아이같이
그 분을 의지하며 엎드린
자국과 무늬들을 무심한 듯 자랑없이
고뇌도 보이면서
아버지,오빠,선생,이웃 아저씨로
수다도 걸면서
하나님 앞 아이같이
그러나, 세기의 검객같이
바람을 타고 가르며
그렇게..... 가십시오
우리 목사님.
인식과 해석의 긴장이 말과 글로 드러나기 전의 침묵......은 무위 자연의 상태가 아닌, 현실의 중층적 구체성을 다소 /많이 추상화하는 과정의 것으로 매우 메타적이고 목적적인 것이겠지요. 그간 목사님이 이 긴장 ( 글과 말 작업으로)상태로 많은 일을 하시느라 피로하신 건 아닌지.....염려합니다. 맛있는 음식도 드시고, 아이같이 놀이도 즐기시고.....망가지기도 하시길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