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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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17:8~24
8 야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9 "여기를 떠나 시돈 지방의 사렙다로 가서 그 곳에서 살도록 하여라. 거기에 한 과부가 살고 있는데 내가 그 과부로 하여금 너에게 음식을 주도록 해놓았다."
10 그래서 엘리야는 그 곳을 떠나 사렙다로 갔다. 마을에 들어서 보니 한 여인이 땔감을 줍고 있었는데 과부였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목이 마른데 물 한 그릇 떠주실 수 없겠소?"
11 여인이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했다. "기왕이면 떡도 한 조각만 가져다 주시오."
12 여인이 대답하였다. "군 떡은 없습니다. 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조금 주워다가 저희 모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것이나 모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오. 집에 들어가서 방금 말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 나에게 먼저 한 조각 가져오고 그 후에 아들과 함께 들도록 하시오.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릴 때까지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15 이 말을 듣자 과부는 곧 집 안에 들어가 엘리야가 말한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엘리야와 과부 모자에게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16 엘리야가 전한 야훼의 말씀 그대로 뒤주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동이 나지 않았다.
17 이 일이 있은 후에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눕게 되었는데 병이 매우 심하여져서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 여인이 엘리야를 추궁하였다.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어른께서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오시어 내 죄를 일깨워주시고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19 그가 말하였다. "부인, 아이를 좀 봅시다." 그는 과부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자기 잠자리에 뉘었다.
20 그리고 그는 야훼를 소리쳐 불렀다. "오, 나의 하나님 야훼여, 당신께서는 기어이 제가 머무르고 있는 이 과부의 집에 슬픔을 내리시어 아이를 죽이시렵니까?"
21 그는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려 몸과 몸을 맞추고 나서 야훼께 기도하였다. "오, 야훼 나의 하나님, 제가 당신께 기도합니다. 이 아이의 몸에 다시 생명의 호흡이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22 야훼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아이에게 다시 생명의 호흡을 주시어 마침내 아이는 살아났다.
23 엘리야는 그 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아이 어머니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부인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24 그러자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십니다. 어른께서 전하신 야훼의 말씀도 참이심을 이제 알았습니다."
저에겐 친한 형님이었던 고 이재왕 시인의 이야기가 주보 1면에 있습니다. 앞서 우리가 불렀던 노래 ‘너는 내 아들이라’의 작사자입니다. 형님과 알게 된 것은 그 분이 세상을 떠나기 7년 전이었습니다. 그 형님에게는 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때문에 널리 알려진 근육 디스트로피입니다. 근육이 서서히 사라지는 질환입니다. 형님은 14살 이후로 한 번도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도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몸의 힘은 계속 빠져나갔습니다. 어릴 시절 형님을 진찰한 의사는 20세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형님의 유작 ‘기쁨 나눠주고픈 그런 가슴 있기에’의 한 부분입니다. “스무 살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나중에 온 몸의 근육이 없어져 죽기보다는 미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좌절감은 커졌다. 면도칼을 팔목에 대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시도했다. 그때 나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 순간 억울함이 끓어올랐다. 이 땅에서의 삶이 지옥 같았는데 일부러 죽어서 가는 곳도 지옥이라면.... 한참을 울부짖었다. 끝내 나는 자살을 못했다.”
올 3월에 나온 통계를 보면 국민 10명 중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답습니다. 자살 풍조가 만연하던 현실을 개탄해했던 저 역시 지난 4월 총선 이후 거듭된 ‘야권 패배 김용민 책임론’ 앞에 제자리에서 설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비탄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이것이 차라리 악몽이었으면...’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부인하고 거역하기 힘든 있는 그대로의 현실임을 바라볼 때에는 눈 앞 창문을 응시했습니다. 창밖은 9층이었거든요. 몇 번 정말 마음을 먹고 창문에 다가갔습니다. 그때면 어김없이 여섯 살 아들이 달려 들어왔습니다. 저도 실패했습니다.
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모든 것이 엉켜서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길을 찾지 못할 때면 우리는 극단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때 교회는 자살하면 지옥 가니 알아서 생각하라고 경고할 뿐입니다. 그러나 당장 칼을 들고, 다량의 알약을 손에 쥐고, 고층에서, 다리 위에 선 사람들에게 그런 경고는 관념 속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영성, 개인의 의지에서 찾도록 만드는 것, 무책임합니다. 자살은 이제 더 이상 나약한 일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의 자살, 스무 명을 넘은지 오랩니다. 이건 형태는 자살이지만, 엄연히 ‘사회적 타살’입니다. △잔인한 진압으로 인한 몸의 상처와 트라우마, 생계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취업이 안 되는 현실, 이거 개인에게 ‘알아서 극복하라’고 할 문제인가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개인을 나약하게 설계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로 불리던 엘리야도 마찬가지. 당시는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던 때. 왕비 이세벨과 더불어 부부는 엘리야를 미워했습니다. 바알신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엘리야는 이들 부부 앞에 나타나 “계속 그렇게 하나님과 등지면 3년 동안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 간 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 예언, 현실이 됐습니다. 가뜩이나 가물었던 이스라엘은 시냇물까지 다 말라 버렸고 집집마다 가뭄으로 농사를 짓지 못해 먹을 곡식이 다 떨어져 갔습니다.
이렇게 예언한 엘리야도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아합왕 부부는 여전히 물 걱정 밥걱정 없이 호의호식하며 살았습니다. 여담입니다. 이른바 ‘IMF'로 불리는 외환위기, 누구 탓이었습니까? 은행 돈을 자기 주머닛돈인 양 갖다 펑펑 쓴 재벌총수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책임은 이들이 져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힘없는 노동자들이 다 뒤집어썼습니다. 자신들은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며 신자유주의라는 파도 위에서 윈드서핑을 즐기며 더 강력하고 공고한 힘과 돈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노동자를 멋대로 잘라도 누구로부터도 추궁당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지금 못지않은 비극의 때를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이라는 땅에 보냅니다. 바알신 믿기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동네였습니다. 이곳에서 남편 잃은 여성을 만나게 합니다. 그곳에서 가난한 과부에게 걱정 말고 얻어먹으라고 합니다.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장 배가 고팠습니다. 하나님이 염치없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 과부에게 ‘나를 위해 물과 떡을 가져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과부는 먹을 것이라곤 털어봐야 한 줌 될까 말까 한 밀가루와, 방울 단위로 남아있던 참기름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라도 나를 위해 만들라’고 주문했습니다.
이 과부는 거절 않고 따랐습니다. 아마 그 속은 ‘하나님을 믿는 예언자인데 날이 이래서 더위 먹었나보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게 옆집에 가서 먹을 것을 꿔 와야겠다’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통에서 밀가루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기름병에서도 똑같이 기름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은 구약시대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이 일화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어려운 와중에도 자신의 처지 보다는 남의 아픔에 눈을 돌리고 공감했던 과부의 선한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오병이어 때는 안 그랬습니까? 있어야 푼돈이었을 소년 하나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내놓은 데서 비롯된 기적이었지요. 기적의 전제는 사랑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 주인공과 줄거리는 달라도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어원을 ‘사르다’에서 찾는 국어학자가 있습니다. 사른다는 것은 나의 존재감, 즉 명예, 돈, 기득권을 모두 포기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바닥까지 긁어모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이들에게 내놓는 사랑, 사랑 중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또한, 기적입니다.
본문에서 벗어나 그 이후의 이야기를 살핍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아합왕 부부 앞으로 엘리야가 다시 찾아갑니다. “왕과 왕비, 여전히 바알을 믿고 있는데, 진짜 신이 누군지 배틀해보자” 이런 겁니다. 방식은 이런 겁니다. 갈멜산에 올라갑니다. 제단을 차립니다. ‘바알과 하나님 중 누가 불을 내릴지’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한 방 먹은 바 있는 아합왕 부부는 이번 계기로 대반전을 이뤄보려고 마음먹고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합니다. 배틀은 시작됐습니다. 850명의 바알신을 믿는 제사장들이 먼저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바뀌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불을 달라’고 목청 높였습니다. 하나님은 불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야의 승리였습니다. 엘리야는 한 발 더 나가 3년 6개월 동안 가물었던 그 땅에 비를 달라고 요구했고, 하나님은 큰 비로 화답하셨습니다.
대망신을 당한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주변에서 비웃었겠습니까. 이러다가 엘리야가 우리 자리를 빼앗겠지 싶었습니다. 민중의 지도자로 부상해서 자기에게 정치적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도 염려했을 겁니다. 그래서 전갈을 띄웁니다. “곧 너의 제삿날을 만들어주마”라고요. 인기의 여세를 몰아 기세등등하며 아합왕 부부와 맞설 것 같았던 엘리야, 그런데 도망합니다. 국경을 넘어 남쪽 유다로 피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로 가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이제 제가 할 일 다 했습니다. 더는 못하겠습니다. 내 생명을 가져가 주십시오”라고요.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의 성격을 발견합니다. 그가 불같은 열정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본질은 심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니까 그렇게 왕한테 개개기도 하고 천여 명에 이르는 바알신 제사장과 맞서기도 했습니다. 자기를 씹으면 더 힘이 나서 맞서 싸우게 되는 정치 에너자이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심약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려 하십니다. 수려한 언변을 갖고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만이 쓰일 것 같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재산도, 능력도, 건강도 변변치 않은,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사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것까지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공했습니다. 성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자신을 죽이겠다는 파발을 받습니다. 그는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은 멘붕 상태의 엘리야를 달래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들려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0일 이상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 후에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하시며 일으켜 세우십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하나님의 능력을 원하십니까. 애써서 가난해지십시오. 마음에 빈 자리를 둬야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엘리야를 생각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독일사람 디트리히 본회퍼입니다. 그는 조국과 조국의 교회가 나치 히틀러의 광기에 동조하며 같이 미쳐가는 것을 보고 애통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국을 떠납니다. 영국에서 촉망받는 목회자로 신학자로 살아갑니다. 그런 본회퍼가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표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입니다. 칼 바르트는 스위스 사람입니다. 예수를 도덕적으로 모본을 보인 인간으로, 성서를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의 기록이요, 윤리적인 지침서에 그치는 것으로 이해했던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총체적인 지배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신성을 믿으면서 신정통주의 신학을 만들어낸 주인공입니다.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했다고 칼 바르트가 사회 현실에 눈을 감고 오로지 개인 구원, 영성에만 치중했느냐. 아닙니다. 나치 독일과 맞서 싸웠습니다.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 신문을!(Read the Bible in one hand, and the newspaper in the other)’이라는 말을 남겼듯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를 강력하게 주문했습니다.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한 본회퍼에게 칼 바르트는 이런 메시지를 던집니다. "당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로뎀나무 아래 있는 엘리야나 박 넝쿨 아래 있는 요나가 되어선 안 됩니다. 당신은 독일인이고 당신의 교회가 불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배를 타고."
칼바르트의 이 말을 들은 본회퍼,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절대 다수의 독일 교회가 히틀러 편에 선 현실, 기독교인이 90% 이상인 독일에서 600만 명 이상을 살육하는 상황, 이런 절망적인 조국에서는 자신이 할 일, 자신이 할 말도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아우슈비츠 같은 곳에서 벌어진 일들. 사람 죽이는 걸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신을 유린했습니다. 머리카락을 또 살을 도려냈습니다. 그때 동원됐던 사람들, 하기 싫은데 억지로 시켜서 그 일을 했느냐. 아닙니다. 기록에 의하면, 자발적이었고, 나아가 그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온 사회가 미쳐 돌아갔던 것이지요.
이런 목불인견의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본회퍼는 그래서, 도버해협 건너 영국으로 건너갔던 것입니다. 본회퍼에게 영국은 말하자면 로뎀나무 그늘 같은 곳이었습니다. (여담인데, 왜 독일의 교회는 나치에게 협력했을까요. 본회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유석성 서울신학대학교 총장은 이런 진단을 했습니다. “사회 윤리나 정치의식이 결여된 채 영혼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내적 망명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예수 믿고 천당 간다’고만 주장하지, 천당을 가기까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치지 않아 사회 윤리와 도덕을 망각하고 있다”라고요.)
본회퍼는 일어섰습니다. 1935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2년 뒤 교회가 강제 폐쇄되는 비운을 겪었지만, 지치지 않고 정부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강연과 출판의 자유를 잃었습니다. 생계에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합니다. 히틀러를 사람으로 본다면,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셈입니다. 지금도 논란이 됩니다. 시대의 지성으로 통한다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같이 뒤늦게 신앙을 가진 분도 본회퍼를 거명하며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참여를 하는 건 나와 맞지 않아요. 그런 건 굳이 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아도 되지요. 사회적 윤리와 도덕으로 하면 되는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결단과 다르다는 겁니다.
본회퍼가 거사에 참여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며 사람을 치여 죽일 때, 나는 목사랍시고 죽은 사람들의 장례나 치러 주어야 하는가? 저 운전, 멈추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1945년 4월 8일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이튿날 새벽 머물고 있던 플로센부르크 수용소에서 ‘본회퍼 죄수, 우리와 함께 가게 준비하시오’라는 간수의 말을 듣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게’라는 말은 모든 죄수에게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바로 교수형. 주변 수형자에게 본회퍼는 “이로써 끝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라고 했답니다. 그 길로 그는 하나님 곁으로 갑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본회퍼의 또 다른 명언입니다. 엘리야 시대 바알은 히틀러의 광기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바알은 무엇일까요. 많은 보수 목회자들은 타종교를 지칭합니다. 저는 기독교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이미 숭배의 대상이 된 돈으로 봅니다. 이 시대, 돈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 세대와 지역, 이념까지 망라해 가장 으뜸인 가치입니다. 노동자를 죽이고도, 그 죽음의 책임을 면하려고 인륜을 벗어난 공작을 일삼은 일부 대기업 총수가 여전히 한국인에게 존경받는 인물 3위 안에 드는 현실은 돈에 미쳐도 한참 미쳐버린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히틀러 시대 대부분의 교회가 나치즘을 지지했듯, 이 땅에 많은 교회는 물질주의 맘모니즘에 함몰돼 있습니다. “헌금 많이 낸 사람이 진정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얼빠진 목사의 예를 굳이 들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절망뿐입니다.
대선이 이제 5개월도 채 안 남았습니다. 지난 4년을 ‘돈(錢)의 나라’ 또는 ‘돈(돌은) 나라’로 만든 ‘장로님 정권’은 히틀러, 아합왕 시대 못지않은 광기와 절망의 세월이었습니다. 이명박 같은 정치인이 권력을 얻어 이를 흉기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저주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민중의 공감대는 일찌감치 형성돼 있었습니다만, 총선을 계기로, 통합진보당 사태를 거치며, 여전히 1등인 새누리당 후보의 지지세를 보고 우리는 의구심과 절망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빈 마음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저는 역설적으로 희망을 봅니다. 이런 고충과 고통의 세월이, 12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그 달 그 날의 하나님의 징조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동지를 보여주고 계시지 않습니다. 옆 사람 보십시오. 자본과 결탁한 불의한 권력에게 표주지 않을 사람, 없는 것 같지요. 히틀러와 동조하지 않는 사람, 없는 것 같지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사람, 없는 것 같지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소유자가 엘리야 주변에만 7000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가능할 최적화된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대대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표징을 여러 사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도입부에 소개했던 사람, 고 이재왕 형님의 책을 다시 펴봅니다. “새벽 3시, 나는 몸을 더 웅크렸다. 어, 이상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내 옷이 젖어있었다. 비도, 물도 맞지 않았다. 나는 절대적인 힘을 느꼈다. ‘깨지도 상처입고 원망하던 나의 삶이 하나님의 안개와 같은 사랑에 눈물 흘립니다.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나를 변화시키셨으며 이 시간 나를 적시셨습니다.” 이재왕 형은 로뎀나무 그늘을 벗어나 자신을 늘 품고계신 하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성경의 한 구절이지만, 이걸 자신을 향한 메시지로 증거한 재왕이 형. 이 책을 내고 7년을 더 살고는 하나님 곁으로 갔습니다.
내 안의 절망, 우리 안의 절망, 하나님은 듣고 계십니다. 우리 실컷 절망합시다. 실컷 지칩시다. 실컷 웁시다. 하나님은 이로부터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정녕 마르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벙커1의 형제 자매여러분, 강한 척 하지 말고 약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읍시다.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 우리의 가슴을 끌어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일하실 것입니다. 변화할 세상, 정의와 평화, 사랑이 넘치는 시대로 이끌어 가실 하나님의 진심을 믿읍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진심 아래 하나님의 손과 발, 심장이 됩시다.
■ 기도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역사와 시대, 가정과 개인의 일상을 가리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빈 마음을 안고 왔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의지할 대상을 찾아 왔습니다. 잡아주십시오. 역사해주십시오. 주님의 기쁨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하는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