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http://안철수, 다운계약서, 도..., 욕망, 

도덕적 인간이란 정치가 만들어내는 허구이다.

인간이란 그 누구도 도덕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이 존재함을 가정한다.

정치란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도덕적인 인간이란 것을 필요로 한다.

정치적인 도적성의 공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공격의 대상이 본래 도덕적인 인간으로 가정되어야만 한다.

이 가정 하에서 만이 도덕적 공격은 성공을 거둔다.

이 함정에 빠져 무력해 지는 정치인들은 대체로 중도에서 부터 왼쪽으로 치우친 정치 인사들이다.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며 그러한 취급을 즐기며 가식적인 인간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그들은 몰락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기에 이들의 몰락은 도덕성에 대한 심판의 결과가 아니라 그런 가식적 태도에 대한 응징의 결과로 보아야만 한다.

도덕적인 채 가식 떨지 않는, 또는 그렇게 보여 지지 않는 보수당의 인물들이 이런 응징을 피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도덕적 정치인은 정치가 만들어 놓은 신화이다.

물론 부정한 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부정함이란 비도덕적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법을 위반하고나 위법함이 드러난 인간들을 지명할 뿐이다.

정치에서 도덕적인 자와 부정한자, 깨끗한 자와 더러운 자로 분할되는 것은 하나의 우화일 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도덕성은 어떤 이를 끌어내리기 위한 수단으로만 의미를 가진다.

이 말의 의미는 비도덕적이기에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끌어내리기 위해 비도덕적임을 증명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가식에 대한 응징은 그 가식이 이미 대중들의 마음속에 미움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만 한다.

이미 대중들의 마음속에 다른 형태로 자리 잡은 이는 어떤 도덕적 공격도 무의미하다.

가치의 판단을 떠나서 이런 상황은 존재한다.

이미 이명박이 그랬었고 아마도 안철수가 그러할 것이다.

아마도 이 번 선거는 도덕적 공방이 무의미한 그런 선거가 될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가치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어떤 계몽을 통해서도 변하지 않는 욕망의 문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가 담론들에 의해 형성되던 가치체제에서 대중의 욕망이 흘러가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는 지는 좀 더 고민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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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2012.09.30 15:58:30
*.185.31.7

떡진머리 님,

추석 즐겁게 보내시나요.

가치에서 욕망으로의 전환이라는 분석이 재미있네요.

적당한 욕망은 삶의 에너지이지만

과도한 욕망은 허무의 씨앗이 아닐는지요.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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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진머리

2012.09.30 23:03:38
*.237.98.114

스피노자가 자신의 저서 "에티카"에서 정의한 내용을 저는 매우 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도 이 내용에 기초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망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

이 말에 동의가 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를 찾기 보다는 어떤 것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욕망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게 됩니다.

 

목사님 추석에 찾아뵙지 못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꼭... ^^

초신자의 특권

2012.10.03 11:32:17
*.244.165.234

욕망의 패러다임 속에서 도덕적임이 결정되는 듯 하고있고 앞으로 더욱 그러할 듯하다는 진단이 재밌습니다.

이념에서 욕망으로의 전환...이 불러올 앞으로의 진행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고

신이 요청되지도 않는, 그런 세계로 자꾸 가는 것 아닌가, 그런 과정들의 징후가 아닐까 걱정스럽군요.

 

그러나

저도 안철수의 등장에 지지를 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있긴 하지만,

날강도들이 설쳐대는 통에 일반화\된 범죄에 다소 무뎌진 반응을 다수가 보이는 것이지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반화된 무감각화된 범법의 동조가 가져올 엄청난 재앙은 사회적으로 분석이될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사회적 합의는 될 수 있을것입니다.

 

안철수씨 캠프에 있는 금태섭 변호사는 세금혁명당을 창당했던 사람이고 세금제도가 얼마나 근본적으로 중요한지를 알고 실천을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이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작은 무감각을 왜 방조하지않아야하는지,

그것의 사회적 결과를 왜 미리 진단적으로 봐야하는 지를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 아닌지 짐작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위의 떡진머리님의 진단이 굉장히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사회의 일면을 진단하면서 내린 결론때문입니다.

 

물론 떡진머리님이 결론에 동조하시지않을 듯 합니다.(옛날의 사진이 참 참신했습니다. 오랫동안 웃었던 기억이 있고 훨씬 젊은 청년일것으로 추측했었습니다.)

그러나 왜 이런 결론으로 사회의 흐름이 자꾸 보여지게 하는냐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할 듯 합니다.

 

세금떼어먹는 것이 일반화된 상황에 대한 구체적 사회적 분석보다는, 그래서 그것이 빚어낸 사회적 결과보다는

개인의 도덕과 (집단적)욕망의 문제로 귀결되게 하는 효과가 있지않을까라는 지나친듯한 우려를 하게되네요.

 

다운계약서를 하지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듯한(물론 있겠죠. 그러나  보다 다수가 한듯한)

이 분위기가 결국은 어떤 사회를 만들었는지를 보다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는것아닌가 라는 뜻입니다.

복지의 후퇴가 기가 막혀서요.

 

그렇다고 해서 안철수씨에 대한 저의 지지가 후퇴하는 것이 아닌 이유는 최소한 이러한 사회적 연관관계를

꿰뚫어보는 관점을 획득했다고 보여지는 여러 태도들이 있기때문입니다.

 

관점이 신선하고 재밌어서 저도 생각을 좀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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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진머리

2012.10.04 00:07:12
*.237.98.114

'초신자의 특권'님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사용했던 표현 중에 "담론들에 의해 형성되던 가치체제에서 대중의 욕망이 흘러가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 '담론'을 님의 표현 처럼 '이념'으로 바꾸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념과 욕망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념 또한 욕망이 표출되는 형태일 뿐입니다.

다만 제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사회의 지배적 욕망이 '담론'이나 '이념'이라는 형태 속에서 숨어서 실행되던 것에서 보다 공공연하게 드러나면서  좀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임을 말씀드립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어떤 시점에서는 욕망이 억제되어 오다가 어떤 시점에 이르러 최대화 되고 있다고 이야기 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욕망은 항상 최대화되어 나타납니다.

다만 어떤 욕망이 사회속에서 어떤 형태로 관철되고 있는가를 좀더 깊게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이 욕망의 사회적 배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욕망이 박정희의 욕망과 대중의 욕망과 함께 어우리지며 6~70년대의 한국사회를 구성했듯이 또한 자본주의와 안철수와 대중의 욕망이 만나지며 후기자본주의적 흐름을 형성합니다.

저는 이것에 대한 객관적이거나 명확한 가치판단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또한 어떤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가치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합의'란 것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사회적 합의'란 것이 변화하는 사회의 '차이'를 반영하며 적용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구조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노사정 합의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재현)을 고정시키는 의미는 있지만 '차이의 반복'을 담지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합의 된 것'이 아니라 '합의 되어지는 것'이 의미를 획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합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진행형으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합의'란 '투쟁'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합의가 민주주의의 내용을 가지기 위해서는 항상 도래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이전의 합의는 항상 새로운 합의에 의해 종언을 고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들을 무가치하게 보면서도 어떤 변화에 대한 사유와 실천에 동의하는 것은 생존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구에 의해 쟁취될 평등이 아니라 당초 출발부터 당연하게 기초되어야 할 평등의 침식 때문입니다.

 

금태섭 변호사가 '세금혁명당'과 관계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듯합니다.

저 역시 한 때 '조세평등당' 같은 정당을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방식의 해결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이로 부터 결과되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님의 예측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 분의 생각을 자세하게 모르기 때문에 그 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기는 힘들 듯합니다.

물론 저 역시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찬성의 의미가 아니라 반대가 가지는 무의미성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실천을 하실 분들은 어떤 비판이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논쟁과 계몽주의가 이런 것을 수정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에 대한 선과 악의 가치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런 행동들의 가치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런 방식들로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들의 상태에 조차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엿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안철수 씨가 근대적 정당의 구조 밖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런 범주의 외부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이런 대중의 흐름과 욕망을 다시금 근대적 정당구조와 후기자본주의 체제로 포획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집권자에 대한 고민'이나 '집권자가 되기 위한 고민'으로 축소해서는 않됩니다.

오히려 권력이 유포하는 유혹이나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꾸려갈 수 있는 대중적 능력의 크기, 권력조차 그런 관점에서 다룰 수 있는 능력의 크기여야 합니다.

 

지지란 표현은 좀더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안철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다만 선택할 뿐입니다.

선택의 기준은 그가 어떤 사회적 연관관계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박근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지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국가의 제도하에서 나를 피지배자로 지배할 집권자를 지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좋은 목자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대중이 양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기에 나중에 한 꼭지로 다루겠습니다.

님의 좋은 글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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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진머리

2012.10.04 00:17:22
*.237.98.114

욕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목사님에 대한 댓글을 확장해서 조금 써봅니다.

읽는 분들의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욕망을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고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바라보고자 합니다.

욕망은 사회를 변화시켜 낼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의 원천이자 역량으로 이해합니다.

들뢰즈의 경우 자본주의를 전복할 유일한 힘으로 욕망을 사유합니다.

여기서 욕망을 긍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지점입니다.

하지만 욕망을 무한히 긍정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지점도 있습니다.

욕망의 카오스적 성격은 구속으로 부터 해방을 불러오는 긍정적 욕망도 있지만 돈의 욕망, 국가의 욕망과 같은 파시스트적 욕망, 마약중독자나 마조히스트, 우울증 환자의 자기 파괴적 욕망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긍정성에 대한 딜레마가 이 지점에서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눌 기준이 존재하는가 하는 점에 다다르면 더욱 난감해 지고 맙니다.

하지만 욕망의 억압이나 통제란 것이 어떤 목적론적 의도에 배치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목적론은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프로이트나 라캉이 바로 욕망을 결핍으로 봅니다.

즉 결핍이 해소되는 상태가 목적의 역할을 합니다.

욕망을 가진 존재는 이 목적을 추구하고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되게 됩니다.

이러한 철학적 자세는 욕망자체가 아니라 욕망이 추구하는 목적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여 욕망을 이 목적에 종속시킵니다.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해지며 욕망은 이 목적 추구과정에 알맞게 제어되어야 할 것으로 사유됩니다.

'선한 기준'의 통제를 받아야 할 것이 됩니다.

이런 제어와 통제는 중세의 신의 세계로 부터 인간의 욕망이 변화의 동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근대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이를 생산과 소비활동으로 포섭해낸 자본주의와 이를 벗어나고자 했던 통속적 맑스주에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 지점에서 욕구와 욕망을 분리해서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욕망을 생산의 힘으로 발견하기 위함입니다.

근대의 초입에서 욕망을 긍정했던 철학자 스피노자도 욕망과 충동을 분리해서 이야기 합니다.

욕구는 바로 이 충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욕구가 욕망과 분리되지 않을 경우 욕망은 조절되거나 절제될 금욕의 내용으로 자리 잡게 되며 아버지의 거세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됩니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저서 "에티카"에서 정의한 내용을 저는 매우 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도 이 내용에 기초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망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

이 말에 동의가 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를 찾기 보다는 어떤 것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욕망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게 됩니다.

이렇듯이 욕망이 선한 것을 규정하기에, 선한 것의 기준으로 욕망을 제어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욕망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긍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긍정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긍정이란 옳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의 존재와 현상자체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수많은 사건들의 흐름은 인간의 이성이 그렇게 선한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성의 폭력성은 이미 미셸 푸코에 의해 낱낱이 드러난 상태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인간들이 좋은 이성과 나쁜 이성을 구분할 초월적 이성을 가지지 못했음을 이야기 합니다.

이런 문제를 뛰어넘기 위해 우리는 근거를 묻지 않고 긍정되는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전쟁을 하지 않고 살인을 피하는 근거나 방법도 파괴의 욕망에 대한 통제나 제어가 아니라 오히려 생존의 욕망을 긍정함을 통해서 입니다.

적과 동지를 나누는 '근거'가 아니라 이런 저런 차이를 수용하면서 긍정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냄을 통해 평화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욕망은 어떤 배치를 이루느냐에 따라 전쟁과 살인이 되기도 하며 우정과 생존이 되기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의 억제나 제어가 아니라 배치입니다.

물론 욕망을 통제하고자 했던 어떤 계몽주의적 방식들도 이런 욕망을 제어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욕망은 부정되거나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무가치하게 긍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초신자의 특권

2012.10.05 17:40:53
*.244.165.234

진지한 답글에 감사드립니다.

자칫 가벼운 글이 지나치게 무거워진것은 아닐까 살짝 염려도 되는데, 제가 평소에 욕망을 거론하는 학자들에게

살짝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하던차에 글이 길어져버렸네요.

 

물론

욕망의 긍정, 욕망의 사회적 배치가 민주적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이기위한 욕망의 대긍정,

양떼로서가 아닌 살아있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개인의 긍정...좋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욕망이 현실화되느냐의 과정에서의 투쟁이 엎치락 뒤치락할텐데,

그리고 그것의 결과에 따라 사회의 성격이 결정될텐데,

이 욕망의 대긍정이 가치평가보다는  배치를 주요 덕목으로 제시하시니, 

결국 뭘 위한 투쟁과정이 될까요?

 

물론 모두의 욕망이 긍정되어야한다는 당위로서 요구되는 궁극적 도달상태로서의 상태가 이해되지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의 욕망이 긍정되는 사회를 위해

아니 보다 정확하게 약자의 욕망이 거부당하고 있는 사회의 수정을 위해,

가치평가를 유보하는 것이 가져올 사회적 결과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는 없을까요?

 

굳이 욕망을 제시하면서 잃게되는 것,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더 있어야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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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진머리

2012.10.07 21:20:44
*.237.98.114

제가 배치를 이야기 한 것은 약자의 욕망은 거부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포획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서민층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에서 보수당의 지지가 높게 나타나는 것에서, 박정희를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학력이 낮거나 경제적 빈곤층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세상을 바꾸어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이야 말로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권력이란 대중에 대한 공포와 억압만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욕망을 포획하여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대중의 열광적 지지 속에서 독일에서 파시즘이 가능했던 것이나 더 오래는 스피노자가 요한 드 비트 총리의 죽음을 통해 목격했던 대중에 대한 고민과 일치되는 지점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욕망이 다른 방식으로 포획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배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포획된 욕망을 어떤 것과 만나게 해야 하는 가에 따라 전혀 다른 양태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가치하게 보는 것은 그것이 선과 악의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적 판단에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기준조차 그것이 공평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가치의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의 가치에 대한 또 다른 가치가 등장할 것이고 이처럼 끊임 없이 어떤 가치의 체계로 소급되어지는 것을 우리는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방법은 없습니다.

 

입이 밥과 만나면 밥먹는 기계가 되고, 연인의 입술과 만나면 사랑하는 기계가 되고, 언어와 만나면 말하는 기계가 되고, 때로는 투쟁의 기계가 되기도 합니다.

욕망 또한 무엇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욕망의 긍정은 부정과 긍정에서의 긍정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으로의 당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약자의 욕망을 거부하지 말라는 주장이나 요구가 아니라 그들이 배치되어 있는 욕망을 어떻게 다른 것들과 만나지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만 하는 문제입니다.

가치평가를 유보하지 않아도 도래할 사회는 그렇게 핑크 빛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들은 가치체계에 의해 만들어졌던 사회주의의 몰락을 경험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역사의 발전을 위한  투쟁은 깃발을 잃어버렸었습니다.

사적유물론에 의한 역사발전의 법칙이란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보았고 세상을 전복하고자 했습니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 또한 결코 선하지 않았습니다.

동일화의 문제, 권력화의 문제를 고민 해야만 하는 지점입니다.

거대 담론이 그리고 그런 가치체계가 어떻게 다른 이론들과 생각들을 질식시켰고 억압했는가를 돌아 보아야만 합니다.

물론 그것이 선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안적 방식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화해 나가는 과정과 사건에 주목합니다.

 

물론 욕망의 배치에서 최소한의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고민해야만 합니다.

이런 지점에서 현대적 윤리학의 문제가 제시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의 유일한 기준은 외부로 향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국가, 자본, 권력화 된 것들, 동일화 된 것들, 코드화 된 것들, 지층화 된 것들 등으로 부터.

님의 말씀 처럼 '잃게 될 것, 얻을 수 있는 것' 등으로 나누어지면 좋겠지만 저는 그 속에서 잃을 것과 얻을 것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얻어야 한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는 가치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치의 선택 보다는 가치 자체에 대한 의미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님이 말하는 가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초신자의 특권

2012.10.08 11:02:33
*.244.165.234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덕목으로 여겨져온 것들입니다. 자유, 평등, 휴머니즘 등(최근에 읽은 책중에는 "평등이 답이다" "경제학의 배신" 등이 있습니다)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실패를 국가자본주의로, 또는 전체주의의 또다른 국가형태로 진단하는 태도들은

최소한 그 사회의 어느 본질적 일면을 드러내주는 면이 있습니다.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역사및 가치평가와 같은 가치를 중요가치로 여겼다하더라도, 그것의 칼날을 피할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둘의 관계를 필연으로 묶을 필요는 없죠.

 

가치를 고집할 필요도 없지만 굳이 포기할 필요는 있습니까? 가치평가는 내재적일수밖에 없는데...

굳이 가치의 포기를 언급하면서 그것의 결과가 불러올 효과를 따지지않으면서 윤리를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 좀더 생각을 해봐야할 듯 합니다. 

욕망을 얘기하면서 오히려 구체적 현실분석으로부터 멀어지는 효과가 있진 않은지 그것이 염려스럽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토론을 촉발시킨 안철수 후보께서 오늘 대구대학교에 오신답니다.

오후 2시 30분인데, 학생들과 함께 가서 만나볼 계획입니다.

 

님이 말씀하신

"어떤 가치의 선택 보다는 가치 자체에 대한 의미를 고민하고 있습니다."라는 발언이

보다 새로운 개인들의 관계를 고민하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많은 경우, 피곤과 도피의 징후들이 있었거든요.

이런 문제점들에 대해선 이미 고민을 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진지한 답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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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진머리

2012.10.08 22:17:48
*.237.98.114

고대 그리스이 철학이 가지는 합의되는 덕목들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경멸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

평등 또한 '폴리테이아' 8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정체는 .... 즐겁고 아르케가 없는 다채로운 정체이며, 평등한 사람들에게도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일종의 평등을 배분해 주는 정체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결코 좋은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에는 정체가 없고 사람들 사이에 분별도 없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의 의미로 사용된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의 철학으로 부터 얻어야 할 것들은 철학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근거와 데모스(인민)에 대한 조롱의 말 속에서 그 조롱에 대한 반발을 통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나  평등의 의미들을 끌고 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경우 대중을 '큰 짐승'에 비유합니다.

소피스트들을 데모스, 즉 큰 짐승의 힘에 굴복한 이들로 이야기 합니다.

플라톤에게 있어 가치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언급됩니다.

그는 민주주의가 올바름의 기준 근거가 없고, 단지 데모스의 의견만이 지배한다고 비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민주주의를 아르케 없음, 즉 지배 없음, 혹은 기준 없음, 척도 없음, 기준 없음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플라톤은 또 민주정체에서 '제멋대로의 자유'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멋대로라는 말에는 존재를 넘어서는 어떤 남용, 위반, 잉여, 차이, 분란의요소가 들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에서 이런 차이와 분란을, 변이와 생성을 야기하는 요소들을 체포해서 추방하려 합니다.

이 처럼 그리스의 철학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찾는 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플라톤은 이런 민주 정체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의 어떤 사상으로 부터 그런 가치를 받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반플라톤의 길을 통해 민주주의를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만하면 님이 이야기하는 자유, 평등과 그리스 철학을 대표하는 플라톤과의 관계를 충분히 이야기 한 듯합니다.

플라톤주의는 사실 모든 가치를 지향하는 철학들에 깊숙히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데아주의가 그것입니다.

이 이데아는 우리들이 망각의 강을 건너며 잃어버린 것이기에 돌아가야할 원본의 세상을 구축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돌아가야할 세상이기에 그것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이 세상은 그것의 복사본으로 저급한 세상이자 이데아의 기준을 통해 평가되는 세계입니다.

 

휴머니즘이라는 인간 중심주의가 파괴해 놓은 세상에 대해 고민을 해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예전에 페북에 짧게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써놓은 글이 있어 대신하고자 합니다.

 

한 때 인간은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상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사라져 갔다.
하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사고하고 있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듯, 세상의 중심이 인간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멀기만 하다.
적어도 우리가 상상하는 기하학적 사고 속에서의 중심은 그 어디에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이 상상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지켜진다.
마치 천동설의 믿음이 그러했던 것 처럼.
그 믿음은 만물이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인간의 이성이 그러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교만과 억지에 의해 형성되어진 것이다.
다른 방식의 사유가 필요하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세상이 요구된다. 인간이 세상을 개척, 개발하거나, 지배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연에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가능한 그런 세상.
중심의 해체, 이것은 권력의 해체이고 내부이 해체이다.
수 많은 중심의 하나이자 그러기에 어떤 것도 중심에 있지 않은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인간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새로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사유하라!!!

 

제가 그리스 철학을 통하여 얻은 것은 플라톤을 전복시키며 오히려 민주주의의 근거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을 비아냥 거림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대로 받다들이며 여기로 부터 민주주의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글을 끝으로 저의 댓글은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대화가 되기 시작하면 의미는 있지만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저의 생각들은 어느정도 밝힌 것 같습니다.

다음에 다른 내용으로 다시 좋은 토론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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