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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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의 밥과 자본주의- 다시 악령의 시대를 묵상함 이라는 시입니다.
고정희 시인은 1991년 43세의 나이로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사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해남 출신의 여성운동가로서 기독교적.민중적.여성해방적 시각으로 민족통일과 민족해방에 대한
희망과 투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비 1992
밥과 민주주의
다시 악령의 시대를 묵상함 -고정희
고백하건데, 내 오랫동안 찾아 헤맨 그대가 있습니다.
총명하고 눈이 맑으며 사려 깊은 그대 찾아 헤맸습니다.
내가 지쳤을 때 비파소리로 나를 깨우며
내가 곤궁했을 때 부드러운 품으로 나를 감싸고
내가 망가지고 망가졌을 때 서늘한 골짜기로 나를 인도하는 그대 찾아
낮과 밤 표표히 유랑했습니다.
때로 산등성이를 날아가는 새의 하늘에서
나는 그대 모습을 보았습니다.
때로 저녁 숲에 내려 앉는 달빛 속에서 나는 그대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아 그리고 때때로
새벽빛이 일어서는 아쓱한 강안에서 나는 그대 발자국 소릴 그리워했습니다.
그런 그대 찾아 멀고먼 땅에 갈망의 닻을 내리고서
나는 오늘 느닷없이 악령을 만났습니다.
찻집에서 너로구나.....마주앉은 그 순간
총명하고 눈이 맑으며 사려 깊은 그대가 다가오는 그 순간
그대 속에 은거하는 악령을 보았습니다.
악령은 시궁창 모습으로 살지 않습니다.
악령은 마귀 얼굴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악령은누추하거나 냄새나는 손으로 악수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무식하거나 가난하지 않으며
악령은 패배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성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를 범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아름답습니다. 악령은 고상하며 인자스럽고,
악령은 언제나 매혹적이며 우아하고 악령은 언제나 당당하고 너그러운 승리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일단 제압한 뒤 우리의 밥그릇에 들어 앉습니다.
악령은 또 하나의 신념입니다.
악령의 이념은 정복자의 승리입니다.
악령의 신호는 분열이며 분단이며
악령의 생존권은 전쟁이며 학살입니다.
악령이 깃든 곳에 거짓 행복, 거짓 평화, 거짓 통일이 있습니다.
악령의 완성은 죽음에 이르는 강시 천국입니다.
그러나 악령은 악에 의한, 악을 위한, 악의 승리에 모순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직 정복자의 승리에 축전을 보내고
그러므로 내가 아직 분열 분단 속에 살며
그러므로 내가 아직 학살의 역사 속에 있다면
내 시대는 바로 악령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그대 향한 내 꿈을 불살라야 합니다.
그대들 악령과 바꾸지 않기 위해서
이제 내가 지쳤을 때 비파소리로 나를 깨우는 그대는 없습니다.
내가 곤궁했을 때 부드러운 품으로 나를 감싸는 그대는 없습니다.
내가 망가지고 망가졌을 때 나를 서늘한 정신의 골짜기로 인도하는 그대는 없습니다.
이것이 악령의 시대에 대가입니다....
달팽이 님,
고정희 시인의 시는 너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절망인가요, 절망에 숨어 있는 희망인가요.
저분이 사도를 당했을 그 때
나도 뉴스를 대하고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벌써 20년이 더 지났군요.
지금도 여전히 악령의 시대네요.
'그대'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