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 게시판에 글을 올렸으나 답이 없어 다시 올립니다.

로마서 6장 7절의 해석과 관련하여 죽은 자들을 실제로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이라고 하는 해석을 보았습니다. 
구절주의(요절주의)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해석하기 힘들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해석했는지 궁금합니다.
참고로 제 생각은 아래와 같습니다.



로마서 6장 1~15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 로마서 6장의 흐름
로마서 6장 1절에서 15절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단락으로서 15절의 결론을 내기 위한 논리전개의 흐름입니다. 5장까지 사도 바울의 논리전개는 죄는 율법이 나오기 전에도 있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면 구원에 이를 수 있지만 사람인 이상 그건 불가능하다 => 구원은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그렇다면 주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죄인이 아니기에 맘 놓고 죄를 지어도 되는가? =>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을 의미(방향성의 의미)하기 때문에 그 방향성이 다시 죄쪽으로 흐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과 같이 갈 수 없다.라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6장의 앞부분은 여기서 마지막 부분인 그 방향성을 다시 죄쪽으로 돌리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같이 갈 수 없다고 밝히는 부분입니다.
 
 

2. 6장 7절의 해석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 구절은 전체적인 문맥상으로 파악하면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구절입니다.
2절에서 밝힌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고, 또 7절로 이어지는 6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에서 말하는 죽은 자입니다.
7절은 이 6절에서 이어지는 ‘죽은 자’입니다. 즉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죄의 몸이 죽는 행위 이고 그 결과 (죄의 몸에서)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논리의 흐름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죄라는 방향성에서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으로 바뀐 것이기에 그 사람이 죄로의 방향성을 계속 유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의를 입게 된 자들은 죄로의 방향성을 가지면 안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체를 지니고 있기에 육체적으로는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구요.
 

 
3. 죄에 대하여
 
원죄란 하나님과의 일치가 깨진 그 상황을 말합니다. 즉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이 어떤 유형의 죄를 지었다는 것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행위로 인해 우리와 하나님과의 일치성이 깨졌다는 것이 원죄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자범)죄란 하나님과의 분리가 심해져가는(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성이 굳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원죄론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설화가 4복음서 중 두군데나 기록 될만큼 초기 기독교에서도 주요한 주제였던걸로 생각됩니다. 원죄론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없었다면 굳이 두군데나 기록하여 원죄론에 대한 해명을 할 필요가 없었을테니까요.
 
원죄에 대한 부정은 ‘인간이 원래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자신의 의도나 행위와 관계없는 일로 심판을 받는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에서 시작합니다. 다섯명이 모이면 싸우게 프로그램 되어 있는 유전자 조작 인간의 싸움에 대해서 심판하는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원래 사람은 하와이에만 살고 있는데 그 하와이의 법을 어긴 사람은 그 자손까지 한국으로 영원히 추방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한국에 추방된 사람은 또 한국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아갈겁니다. 그렇게 몇 대가 흐른 뒤에 그 자손들은 선조가 하와이에서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다라며 하와이로 가고자 하지만 이미 선조의 위법으로 인해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부당한 일입니다. 선조의 잘못으로 인해 내가 피해를 봐야 한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일치성이 깨진 것이 선조의 잘못이라면 그 깨진 것은 특별한 방법 없이는 온전히 회복하기가 불가능하기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일치가 깨어진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원죄론입니다.

현실세계로 돌아와서 내가 기아로 굶주리는 북한이나 아프리카에 태어나지 않고, 내가 한국에 태어난 것이 하나의 복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분명히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죠. 만약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이건 불공평하다며 주장해서 다시 태어날 때부터 부귀의 차이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자고 해도 이미 인간이라는 사회에 속해 있는 이상(인간으로서의 삶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에 산다는 것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인간세상에서 불공평하게 태어나는 것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불평등이 하나님이 잘못 창조한 잘못일까요? 제 생각에 그렇게 불평등하게 된 것은 인간이 살아오면서 쌓인  행동들의 결과물이지 하나님이 결점을 가진 인간으로 잘못 창조하였기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예로 돌아와서 마찬가지로 하와이가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할 숙명같은 겁니다. 이것은 어떤 잘못을 저지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가 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이후의 죄란 그 분리가 심화되는 걸 말하는 거구요.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에 갓 태어난 태아의 경우도 원죄 때문에 구원을 못 받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역사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4.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 진술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죄와 상관없다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죽기 전에는 결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에 대한 생각.
 
(1)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죄와 상관없다는 뜻에 대하여
앞서 살핀 것처럼 문맥을 읽어보면 여기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실제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가 죄에서 죽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분리라고 할 때 죄와 상관없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는 일이 하나님과의 분리의 회복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은 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사람은 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하는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겁니다.(실은 신정통주의적 신학내용을 보면 이런 보편적 구원론이 바탕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식화 하자면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겁니다.
죄 = 하나님과의 분리
죄와 상관없음 = 하나님과의 분리와 상관없음 = 하나님과의 분리의 회복
죽음을 통해 죄와 상관없음 = 죽음을 통해 분리가 회복 = 죽음은 모든 이들의 구원의 행위
 
아니면 죽은 사람이 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과의 분리 여부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 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분리가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일테니까요.
 

(2) 인간이 죽기 전에는 결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뜻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여기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실제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가 죄에서 죽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문맥상의 의미를 무시하고 단순히 문장으로 생각해 봐도 고려할 만한 것이 많은 표현입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육체적 인간이기에 육체적 한계로서 죄성을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6장에서 이야기하는 것 중 중요한 내용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의의 전가로 인해 인간인 우리도 육체적 죄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변화되게 되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과 연계해서 생각한다면 죽기 전에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 죄에서 의로 바뀌는데 하필이면 그 시점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되는 시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으로 방향성이 바뀐 시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된 이후 육체적으로 죽는 시점이라는 겁니다. 즉 뭔가 이상한 결론이 나오고 맙니다.
 
도식화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 죄에서 의로 바뀜 =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가지게 됨
죽기 전에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 = 죽기 전에 죄에서 의로 바뀔 수 없음 = 죽기전에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가질 수 없음 =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될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