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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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년>
“너는 언제 대학가니?”
요즈음 나를 만나는 어른들이 가장 궁금해 하시는 질문이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되니 이제는 ‘홈스쿨러’ 라는 말로만 나를 표현 할 수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듯 십대를 마치며, 자연스럽게 ‘홈스쿨링’에서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에 나가기 위해 신청서를 썼다.
학교 혹은 직장을 적는 칸에 ‘올해로 스무 살이 된 홈스쿨러 입니다.’라는 말로 대신 소개를 했다.
현재의 나에겐 남들에게 보일만한 제목을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 눈에 나는 그저 대학에 가지 않은 학생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대학에 가지 못한 고삼(고3)일지 모르겠다.
이전엔 구태여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홈스쿨링’이라는 이름 아래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꿈을 꾸어가고 있는지 와는 아무 상관없이 대안 교육이라는 이름만으로 대단하다하고, 멋지다 하였다.
하지만 이젠 그럴듯한 포장지가 사라져 버렸다.
“너는 대학에 안가니?”하는 질문에
“아직 제가 꾸어가는 꿈속에 대학이 필요치 않아요.
저에게 필요한 때가 왔을 때 문을 두드려 보려고요.” 하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전과 같지가 않다.
나는 꿈을 꾸며 말하였는데, 사람들의 눈빛 은 나를 변명하는 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늘 나의 곁엔 나를 지지하고 인정해주셨던 어른들이 계셨기 때문일까?
사람들의 눈빛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누가 무어라 한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을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그 마음이 싫어서 다시 나를 포장할 그럴싸한 포장지를 찾아다녔다.
뒤돌아보니 나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제목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의 입에서 “아~”하는 감탄사가 터져나올만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에 접어들게 되었다.
누가 보아도 좋은 포장지를 찾는 일은 나의 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꿈을 꾸는가?
이 질문에 대해 수많은 답들을 고민해야겠지만,
확실한 것은 사람들의 눈에 그럴듯해 보이기 위함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꿈꾸는 아이에서 이루어가는 청년이 된다는 것은 입고 있던 포장지를 하나씩 벗어가는 일이다.
앞으로도 나는 몇 번쯤은 더 이 포장지들을 벗어야 할 것이다.
멋진 포장지들을 두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깊이를 담아 그 자체로 아름다워져 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나는 이제 새로운 포장지를 찾는 일을 그만 두었다.
예전처럼 다시금 ‘나’에게 집중한다.
열아홉 살의 나도, 스무 살의 나도, 나는 ‘나’이다.
나를 향한 말들이, 시선들이 바뀐들 어떻게 하겠는가,
세상이 무어라 해도 나는 꿈꾸는 사람이다.
나에게 변한 것이라면 꿈꾸는 아이에서 꿈을 이루어가는 청년으로 자랐다는 것 뿐!
오늘 저의 포장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포장지가 빈약하다고 하네요.
이제까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직접 들어니, 마음 쪼끔 무겁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저의 포장지는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그런 포장지가 아닌 데라는 마음을 가지지만,
조직의 틀 안에서는 마냥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만은 없네요.
소비자 기호에 맞게 잘 키워진 온실의 꽃!
봐 주는 사람 하나없는 들판에서 핀 야생화!
어느 것이 좋을까요?
저는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으로......
(지금 맘에는) 그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삶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니! 지금 이 자리가 그 자리는 아닌지(?)라는 반문과 함께.
예쁜 글 잘 보았습니다. ^^
ps. '서와'가 어떤 의미인 지 여쭤봐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