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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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잠들기 전,
가족들이 둘러앉아 소리 내어 책 읽기를 합니다.
한권의 책이 정해지면 그날, 책 읽는 당번이 읽어주는 형식입니다.
낭독의 유익에 대한 다양한 장점은 차치하고라도, 혼자서 묵독 할 때보다 두꺼운 고전을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누군가 읽어주는 책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맛은 꽤 괜찮습니다.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내용으로 책을 읽으니, 서로 모르는 것을 묻거나,
느낀 부분들을 얘기하고 나누는 시간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요즘 우리 가족이 읽고 있는 책은 정민 선생님의「삶을 바꾼 만남」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강진 유배시절 제자 황상과의 만남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에는 실제 다산과 황상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산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권력과 명예를 얻어 거침없이 살 수 있는 열복과
자연에 순응하며 자족하며 소박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청복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이 두 가지 가운데서 택하는 것은 다만 그 성품에 따른다하시며,
하늘이 몹시 아껴 잘 주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청복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열복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청복을 얻은 자는 몇 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제자 황상이 열복보다 청복에 마음이 끌린다며 구체적인 세목을 적어달라고 하자
다산은 마음이 한껏 기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열복을 원합니다.
내 자녀에게 열복을 누리게 하려고, 혹여 그 복이 다른 이들에게 넘어갈까 치열한 싸움을 싸우며 경쟁합니다.
그건 그리스도인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출세해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열복을 욕심내는 사람들의 자기 미화일 뿐, 진정한 성서의 정신은 아닙니다.
청복을 누리는 사람에게 주어진 진정한 복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힘을 얻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열복을 좇아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 진정 청복을 누린 사람들은 그 향내가 다를 것입니다.
애써 누군가를 가르치려 해서가 아니라 그 삶의 자리만으로 아름다운 영향력이 되어 줄 것입니다.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성품에 따르는 것이라면,
청복은 욕심을 낸다고 얻어지는 복이 아니라 청복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 성품은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복일 것입니다.
황상이 다산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어쩌면 다른 이들과 동일한 열복을 흠모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귀한 만남을 통해 그는 진정한 복을 구할 수 있는 성품을 갖추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황상은 진정 복 받은 사람입니다.
세 아이를 둔 어미로서, 그 복이 우리 세 아이들에게 임하기를 감히 욕심내어 봅니다.
열복, 청복이라는 말이 있군요.
저는 처음 듣네요.
몇 년 전에 기독인들 사이에
고지론과 청부론이 한참 유행했었는데,
사람들이 참 헷갈려했어요.^^
줏대가 없으면 딱 걸려들만한 말이잖아요?^^
성공해서, 부자 되서 하나님께 영광드리자,
이런 거였으니, 얼마나 매력적이었겠어요.
저도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두 살박이 아이
신발 바꿔 신은 표정이었을 뿐, 딱 정리되지가 않았는데,
이제는 그건 아니네.. 과감하게 말할 수 있네요.^^
열복, 청복처럼 화끈하게 구분점이 있었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헤매지 않았을텐데..^^
제가 옛생각이 나서 주저리 주저리 했네요.
실은, 삼남매가 너무 부러워서네요.
서와, 그리고 두 동생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언제 만날 날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니, 꼭 만나보고 싶은걸요? 글구..하루님도 목사님도..
하루님은 욕심쟁이시군요.
그런 좋은 복을 세 자제분들이 다 누리시길 원하시니.
그래도 그런 욕심은 내셔도 될 듯합니다.
청복은 세상이 감당하기 힘든 복이라
얻을 수 있는 분만 얻어 누릴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서 저도 감히 청복을 누리고자 하는 욕심 부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