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
필자의 글에 쉽게 수긍하게 되시는 분들이 많지 않으실듯합니다.
충분히 배우지 못한 비전문가로서 성경을 논하고 선악과사건에서 자기 주장을 하다 결국 복음까지 논하는 모습을 보며 교만하다고 여기며 흥미를 잃으실지도 모르겠군요
"복음을 함부로 논하다니 자신이 성경을 얼마나 안다고 저런 소리를 한담!" 중요하고도 정확하게 설명되어야함에도 가볍게 말하는 듯한 필자의 모습을 보며 말문이 막히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지금 핵심적으로 생각하는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은 지금부터 약 40년전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인에게 의 처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후 유대인에게서 부터 시작된 복음의 역사는 이방인으로 전해졌고 그이후 전세계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중간에 갑자기 뚝딱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에게서 전달받는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동하며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대를 잇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40년전 시작된 복음의 역사를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십니까? 사실 저는 우리나라 죄사함거듭남 초창기세대 복음전파자의 자녀로 교회를 부모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켜보며 다니며 말씀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 역사속에서 주님을 믿게 되었구요. 그리고 그 편협함의 교만을 벗어내기까지 15년넘게 방황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라함은 대규모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는 역사를 말합니다. 그냥 한명 두명 띄엄띄엄 가물에 콩나듯이 거듭나는 것은 다양한 교회에서 언제나 있었던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형성은 많은 사람이 죄를 회계하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큰 사건이지요
죄사함과 거듭남이 처음에 들어왔을때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그것을 믿는이들을 이단시 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나 성당에 다녀도 계속 죄를 자백해야하고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죄를 짓는 데 우리의 죄가 영원히 사해졌다라고 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교만한 행동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은 사람이 옛사람을 아직 버리지 못해 죄를 짓는 것과 원죄가 사해진 것 사이의 헛갈림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많은 것이 헛갈림으로 다가옵니다. 구원받은 믿는 사람에게 하는 말씀과 믿음이 생기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 비슷하고 하나로 보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자에게 전해들으면 성경 말씀이 분별이 가고 깨닫고 이치를 알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것이 복음과 교회의 역사였습니다
처음엔 이단시 되었던 죄사함과 거듭남이라는 것이 4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의 정론이 되지 않았습니까?.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인정받는데 수십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이해가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신비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의 말씀만 들어도 일어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들어도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믿게 되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런 믿어지지않는 사람이 많을 때에는 소수의 믿는 사람이 사이비로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에 대한 자기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이 곧 믿음이 생김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은 무엇으로 보입니까? 사랑으로 보셨다면 당신은 믿은 사람입니다 열심히 살라고만 하는 분으로 보인다면 당신은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셔야합니다
최근 선악과와 복음이라는 글을 통해 우리는 성경의 중요한 단어인 "죄"라는 것의 의미를 보고 있습니다. "죄"라는 의미가 "의식"을 의미한다라는 말씀을 계속 드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로마서 7장의 후반부에 잘 설명되어 있더군요.
여러분은 "죄" 가 무엇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성경상의 죄의 근본의미를 알려면 언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국의 유명 문학작품이 우리말로 번역되는 경우 우리말로 번역도 쉽지 않지만 번역이 잘 되더라도 잘 읽혀지지 않고 좋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마술이나 장난으로 설명됩니다. 제가 요즘 잡고 있는 데미안이란 책은 독일인의 분석적인 사고로 글이 계속 진행되어 직관적인 제게는 편치 않은 글입니다. 다른 생각이 없고 집중력이 좋을 때는 즐겁게 읽을수 있지만 직관적 사고를 많이 하는 요즘, 그 책은 진도가 잘나가지 않습니다. 독일인의 정서에서 나온 천재적인 문학이지만 정서가 다른 우리나라사람이 이해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우선 번역이 정확하게 되지 않습니다. 세월이 가며 여러 번역서들이 나오고 비교되면 원래의미를 찾아가지만 그렇게 잘 번역된 책을 읽어도 즐겁지는 않습니다.
그건 우리나라 사람이 분석적인 글을 좋아하지 않는 사고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고구조는 또한 한국어란 언어적 영향을 무시할수 없으며 둘은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합니다. 이것이 언어학에 대한 요체입니다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정신분석학자 라캉, 철학자 비트겐 슈타인같은 천재들은 공통적으로 언어에 주목합니다. 비트겐은 철학의 중심이 알고보면 언어라고 얘기했으며 언어의 마술에 의해 빚어진 혼란을 청소하는 활동이 철학이 연구되는 과정이었다고 말합니다
프로이트를 이어받는 정신분석학자(크게 심리학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라캉도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즉 이제 우리는 언어를 통해 빚어진 혼란을 성경속에서도 청소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죄" (sin) 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그 "죄 " 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잘못 실수 탓 fault 이거나 범죄 crime 부도덕 immorality 의 결과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의 죄 sin는 정신적인 무형의 뭔가를 설명하는 고유한 단어로 생성되었다 무엇을 설명하는 것일까?
성경속에서 죄라는 것의 의미를 밝혀주는 부분이 등장한다. 함께 보도록 하자
로마서 7장입니다
7절에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을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 존재가 드러난다고 했다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탐심을 알게 되는 것" 그과정에 죄라는 것이 작용한다고 합니다
8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속에서 각양탐심을 이루었나니
- 기회를 타는 것이다 (5절의) 정욕이 생기고 탐심을 이루는 것이라 하였다
9절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법(율법)은 선입니다. 깨닫지 못할때 는 살았더니 란 아담이 타락하기전 즉 선악을 알지 못할 때는 살았더니 법이 생기면서 즉 선이 생기면서 "죄"라는 것은 살아나고 죽게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13절 그런즉 선한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죄의 개념이 드러나기 위해 선한 것이 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14절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아래 팔렸도다...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진정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된 이유를 "죄"라는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17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는 진정한 자기를 이야기하며 죄가 내속에 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죄" 가 나를 행하게 한다고 합니다. 죄가 정신의 추상적 개념임이 더욱 드러납니다
18절 내속 곧 내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선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내속엔 선이 없고 죄가 있어 선을 원하지만 행할수 없고 악을 행하게 된다 바로 내속에 거하는 죄란 선악의 분별하는 의식입니다
20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 죄라는 의식(분별함)이 원치않는 악을 행하게 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21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자신속에 선을 원하는 자기의 발견이며 악이 함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23절 ...죄의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내속에 있는 악을 일으키는 존재 바로 죄입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딜레마 상황에 처한 인간이란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절 우리주 예수그리스도께 감사하리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것은 곤고한 우리의 안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 란 용어 참 어려운 용어인듯 합니다
(원어 성경이 복잡한 부분에선 유독 어렵네요. 다른 쉬운 번역의 성경들을 봐도 이런 부분은 더욱 쉽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죽어가는 것에 내가 의식하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등의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죄를 말한다.
문득 죄는 선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선의 오용...
인류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 상상력의 오용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현대신학자들의 도움없이 혼자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대단하십니다. ^^
혹시.. 서로 용어에 대한 오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목사님의 박옥수목사님에 대한 설교비평이 있으니
한 번 참고해 보세요.
http://dabia.net/xe/index.php?mid=comment&page=3&document_srl=8821
저는 현대 신학적 용어가 접근하기에 불편하지만 그래도 이해할만했어요
정용섭목사님에 관해 좀더 이해하게 된 거 같아요 대구성서 아카데미를 검색하면 아래에 블로그 글이 하나뜨잖아요 정목사님에대한 이단 시비지요 제가 이단이어서가 아니라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약간 이단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자신이 믿게된 말씀에 대한 용기이며 선함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착각이었다 해도 말이지요.
카톨릭 미사에 대한 관심과 작은 설교 등의 내용은 충분히 이해가는 내용이며 그것을 개신교계의 누가 인정해 주겠습니까 교만이지요 아무리 옳은 내용을 알고 있어도 그것이 옳고 타인은 틀렸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이고 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단규정자체가 정확한 교회의말씀을 구분하는데 필요할 지언정 그것은 자연스러운 말씀의 발견을 막는 죄의 결과이고 교만이란 말입니다
이단의 이야기에 홀려서 떠나가는 교인을 불쌍이 여기면 안됩니다 새로운 사실이 사실이라면 잘된것이고 틀리다하더라도 미혹될만한 사람들이 미혹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라고 해야 기존 교회가 순전하게 유지될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단을 나누는 교회의 의식적인 활동은 불필요합니다 정용섭 목사님도 그렇기에 관용이 많으시다고 생각합니다
http://dabia.net/xe/index.php?mid=free&page=2&document_srl=675041
딕욕이 정통성을 부인한 이유도 그것이고요 권목사님은 1973년경 딕욕때 거듭나셨으니까요 그리고 90년대초 돌아가시고 교회가 사그러들었는데 지금은 박옥수님이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권목사님 설교는 지금도 가슴을 울리는 듯해요 정용섭 목사님이 지적하시던게 한가지 사실에 너무 올인한다는 것인데 권목사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믿게된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많은 연결된 성경말씀을 발굴하셨고 그 정수에 이르고 있었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게 교회가 개인적으로도 신앙생활의 끝이 가나안에 도착하는 것인데요 그것은 안식입니다 권목사님은 안식에 못 도달하신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주변정황으로 봐서요 돌아가시기전 안식의 베일을 벗기지 못하셨거든요
권목사님의 교회의 특징은 성경중심적이란 겁니다 성경속에서 연결을 찾아가시지요. 인위적이진 않아요. 신학이론도 결국 성경에서 출발하는 거니까요
그의 말년 광야여정에 대한 릴레이 설교와 욥강해는 센세이션이었어요 이런 구약의 글에서 이런 신앙생활과 교회의 가는 길을 길어올리다니 생각했었지요 90년대 초반의 일이군요
박옥수님보다는 제가 그나마인정하는 분이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입니다 그 교회에 다닌 적은 없는데 그분은 성경의 원리에 어느정도 도달하신거 같아요 사목도 왕성하시지요 나름 의미가 있고 상당히 정수라 생각이 되요 개신교 전체에서도 꽤 유명하시잖아요 그분 교회에 안다니는 다른 교회분인데 그분 책을 보시고 추천해주시더군요 읽어봤는데 지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는 권목사님에 못 미치더군요
암튼 박옥수님은 처음과정만 중시했지 성도들의 영육간의 양성에는 소홀히 한듯하고 이동원 목사님 같은 분이라도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박옥수님에 대한 글 참 지당한 부분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최소한 카톨릭이나 개신교에 다니는 분이면 구원받으셨나요 하고 물으면 네라고 대답하게 된 것이 과거엔 그러지 않았습니다. 구원! 믿고 열심히 교회 다니다보면 죽을때 구원받는 것이지 라고 하며 염증반응을 보이셨거든요. 두번째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을 서로 형제 자매로 부른 거죠 그래서 송현곤 형제님 모모 자매님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불렀었죠
예전에만 해도 구원이란 말만 써도 구원파냐며 사이비다 했는데 지금은 성경에 나오는 것을 인정하고 구원이란 말을 자주 쓰며
좀더 실질적으로 성도간에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형식이 .....많은 교회들에서 보편화 된 것을 보면서 세월이 지나며 많이 대중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권목사님의 사목이 이단으로서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저에게는 깊은 감동을 주신분으로 잊혀지지 않습니다
송현곤님,
좀 이른 시간이네요.
밖에 늦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군요.
오늘이 성령강림주일이지요.
찬송가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내려 주옵소서" 가 잠시 생각나는군요.^^
정목사님 글 읽으셨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박옥수목사님의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은
"칭의론"의 왜곡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칭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박옥수목사님이 주장하는 교리에 대해서 별 흥미를 못 느낀다는 거지요.
송현곤님께서도 언급하셨지만, 그동안 우리는 칭의론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칭의론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교회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송현곤님께서 다비아의 글들을
많이 접해 보지 않았을 겁니다. 차근차근히 읽어나가시다보면,
제가 왜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 칭의론의 왜곡현상이라고 말씀드렸는지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한 견해를 말씀하셨는데, 저도 기본적으로는 동의합니다만
검색창에서 보신 그 블로그를 기준으로 정목사님을 이해하신다고 하신다면
좀 긴 시간을 두고 다비아를 접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네요.
송현곤님이 여기 들어오시자마자 본인의 생각을 전하다보니
아직 다비아가 어떤 곳인지 잘 파악을 못 하셨으리라는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씨백이십 님에 대해서는..
다비아핵심멤버로 아셨다고 하니 제가 그렇지 않다, 말씀드린 거고요.
그 이씨백이십 님이 송현곤님의 글 내용에 흥미를 느꼈는지 저는 알수가 없네요.
그리고 두 분이 앞으로 어떤 대화를 하시든지, 저는 이쯤에서 관심을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송현곤님이 댓글 바꿨다고 말씀 드린 적 없는데,
저한테 말씀하시는 것 처럼 읽혀지네요. ㅎㅎ
하옇든..
저는 송현곤님의 글 내용보다는, 아니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남의 생각이나 혹은 허구, 허영이 아닌
진솔하시고 '본인의 글'을 쓰신다는데 관심있었습니다.
펑안하고 기쁜 주일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에도 또 하나 다셨구요. ^^
찬찬히 잘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송현곤님께서는 이왕 여기 다비아에 들어오셨으니까,
다비아가 어떤 곳인지 먼저 탐색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러다보면 송현곤님이 말씀하시는 죄론에 대해서도
수 십년전에 신학계에서는 이미 교통정리가 된 상태라는 걸
인지하시게 될 것이며, 다비아에서 추구하는 신앙, 신학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잘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느끼기에는 송현곤님이 주장하시는 이론은
여기 다비안들에게는 별로 흥미거리가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다비아는 워낙에 다양한 분들이 오시니까요.
그러나 제가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여기 다비안들 대다수는 지극히 상식적이며 사리분별이 분명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송현곤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던지 잘 경청하시고 잘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송현곤님 글에서 송현곤님이 남을 배려하시는 마음이 깊으신 분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마음에 화답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또 달게 되는군요. ^^
왠만해서는 이런 일에 잘 관여하지 않는 성격인데 말이지요.
송현곤님, 다시 한번 부탁드리지만 다비아의 여러꼭지들 글을 찬찬히 잘 읽어 보세요.
큰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평안한 주일 오후 보내세요.
예수님이 죄라는 선악의 의식 을 사했다 즉 사라지게했다는 말이 진실이지요 선악의식에서 해방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희생의 사랑을 믿으면 의식이라고 하는 죄가 사라지고 아담의 타락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살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말이지요 죄가 사해졌다라는 사실에 중점을 두면 박옥수가 되고 믿긴하나 죄의 문제가 계속 자백해야한다라고 하면 기존 구교와 신교가 되는데
결국 이것은 죄라는 용어가 가져온 혼란이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오듯 초대교회때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 이 사실을 알게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예수님을 믿던 사람과 죄사함을 믿는 사람과 카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딕 욕은 개인 자격으로 자신의 신앙을 전했을 뿐 정식으로 목사 안수나 선교사 파송을 받은 기록이 없고요,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은 정설이 아니라 아직 이단으로 분류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년 전 예장연이 만든 [정통과 이단]이라는 책에서 이단성이 없는 교단으로 분류했었지만,
이 책 자체가 공식적으로 폐기 되었으니 기존 입장이 고수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중 기쁜소식선교회의 박옥수 목사의 경우는 스승 격인 딕 욕에게도 관계성을 부정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