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라고 말하는데 반해서 누가복음은 단순히 ‘가난한 자들’이라고 했다. 심령은 오늘 잘 쓰지 않는 단어다. 프뉴마는 영, 또는 정신이라는 뜻이다. ‘마음’으로 번역해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순수한 우리말인 마음은 프뉴마를 담기에는 너무 단순해 보인다. 루터는 그것을 ‘geistlich’라고 번역했다. 영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마태의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라는 표현과 누가의 가난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보기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누가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예수님의 탄생 설화에서도 마태복음에는 당시 최고 석학이라 할 동방박사들이 등장하지만 누가복음에는 하층민에 속하는 목자들이 등장한다. 누가복음은 어린이아들과 여자들도 크게 배려한다. 누가복음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된 이들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부자들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는 진술을(눅 6:24) 하나로 묶어서 판단하면 더 분명하다.
‘가난’의 문제는 인류에게 큰 숙제다. 어느 누구도 가난한 사람이 없으면 좋겠지만 가난한 사람이 없는 세상은 없다. 미국에도 가난한 사람은 많다. 복지가 남다르게 잘 갖추어져 있는 북유럽 국가에도 가난한 사람은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크지 않은 나라를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한다. OECD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가장 큰 나라 중의 하나라고 한다.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
이것은 사회과학에 속하기 때문에 내가 자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다. 상식적인 차원에서만 이렇게 한 마디 할 수 있다. 60, 70 년대의 군사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압축성장에만 몰두하느라 경제정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1990년 대 후반에 터진 IMF 체제를 거치면서 경쟁력 제고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신자유주의에 완전히 종속되면서 빈부격차는 더 심화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