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가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말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뜻일까? 즉 내세 천국을 가리키나? 그러니 지금은 인생이 고달파도 참고 지내라는 말일까?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복음이 ‘민중이 아편’이 되고 만다. 빈부격차의 문제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경제정의는 무의미한 구호에 머물고 만다. 이건 오해다.
이 문장을 좀더 깊이 이해하려면 하늘나라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늘(하나님) 나라는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대적인 것에 묶여서 산다. 다른 사람보다 좀더 돈이 많고 좀더 건강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으로 만족해한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체제는 이런 삶의 방식으로 더 강화하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하늘나라를 복지가 최상으로 보장된 세상으로 여긴다. 심지어 하늘나라에도 상급이 차별화된다고 여긴다. 지금은 가난하지만 하늘나라에 가면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하늘나라가 그런 정도 수준이라고 한다면 질적으로 다른 세상이라고 할 수 없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전적 타자’(totaliter aliter)라고 표현했다. 하늘나라가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면 그 나라는 전적으로 우리의 세상과 다른 나라다. 여기서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이다. 그 나라는 우리의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나라다. 우리의 인식, 범주, 개념을 다 뛰어넘는다. 우리는 그 나라를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 그 나라가 오히려 우리를 규정한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가리켜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라고 했다. 창조의 능력이 있는 존재만이 우리를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신학적 해명을 일반 신자들은 어렵게 생각하거나 공허하게 생각한다. 지금 일상에서 경험한 것에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물론 중요하다. 우리의 사유보다도 일상을 뚫어보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일상을 그대로 뚫어보는 게 아니라 왜곡된 상태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을 소유하거나 확대하는 것에만 매달린다.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한다. 우리 편은 늘 옳고, 상대 편은 늘 나쁘다는 식이다. 지금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증오하듯이 말이다.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이라는 말을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가치관과 세계관 너머를 보면 된다. 예컨대 대기업 임원이나 그 기업의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 아주머니들의 연봉이 비슷한 세상은 어떤가? 그런 세상을 누가 강력하게 기다리겠는가?
존재의 나약함을 시인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희망을 바라볼수 있는 생명을 기독교가 전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