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마지막 항목은 의(義)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말로 의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수네’는 righteousness, justice로 번역될 수 있고, 또 ‘what God requires’로 번역될 수 있다. 도대체 의란 무엇인가?
마 6:33절은 이렇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기서도 의는 디카이오수네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본다. 스스로 의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의를 인식할 수 있는 자도 없다. 구약성서는 율법을 행하면 의로워진다고 가르쳤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부단하게 외쳤다. 인간의 의를 완전하게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최소한의 의를 구현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 불의가 교정되긴 했지만 실제로 변한 건 많지 않다. 예수 당시에는 율법이 의를 왜곡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율법을 통한 의가 삶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우리를 위선에 빠지게 하는지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곳으로 알려진 법정을 보라. 법에 의해서 정의가 세워지기도 하지만 거꾸로 정의가 파괴되기도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빈말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과 역사에서는 더 심각하게 정의가 파괴된다. 사교육의 극대화로 교육의 현장도 정의롭지 못하게 되었다. 대형 마트와 소형 슈퍼가 정의롭게 경쟁할 수는 없다.
인간이 의를 실현할 수 없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의가 하나님의 속성, 또는 하나님의 소유, 그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의로워진다고 말하지 않고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그게 소위 칭의(稱義, Justification, Rechtvertigung)론이다. 인간은 죽었다 깨도 실제적으로 의로워질 수 없으며, 궁극적인 의를 인식할 수도 없고 실현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팔복과 산상수훈에서 의를 실천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왜 요구하시는가?
그 문장을 정확히 보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박해는 주로 믿음 생활과 연관된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박해가 그들의 실존을 위협했다. 예수를 믿는 것, 예수를 전하는 것이 바로 의를 위해서 사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했다.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보다 더 큰 의는 없는 것 아닌가.
이런 궁극적인 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정의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 삶에서는 분명히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실천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 한계를 전제하면서도 서로 연대하여 투쟁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