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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언급한 말인데,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생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토대에 둔다.
그 미완의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을 가리켜
주의 재림, 종말, 심판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여기에 집중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종말론적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말이 실질적으로 들리느냐에 있다.
지난 주일 예배 후 환담 중에
어떤 신자로부터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
예수의 재림 때 일어날 생명의 완성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긴 하지만
그 생명의 완성이 구체적으로 손에 들어오지 않아서
기다린다는 그 영성에 동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설교자가 청중들의 영적 상태를
좀더 세심하게 이해해야 하며,
설교 내용이 좀더 실질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생명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미완의 생명이 무슨 뜻인가?
리얼리티, 존재, 이데아, 에이도스, 진리, 변증법, 역사 등등에 대해서
평소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상에 충실하게 살아가던 청중들에게
생명의 완성이라는 말은 느닷없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설교가 지식인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어서는 곤란하다.
현학적이어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일상에 매몰되지는 않으나
일상에 두 발을 딛고 선 설교여야 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설교가 과연 가능할까?
더구나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해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만 가야 한다.
그게 설교자의 숙명이다.
그런 길을 묵묵히 가려는 젊은 설교자들을
오늘의 한국교회는 거부한다.
대신 약장사를 요구한다.
그게 오늘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위기라고 말하면
패배주의자의 자기 합리화일까?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생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토대에 둔다.
그 미완의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을 가리켜
주의 재림, 종말, 심판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여기에 집중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종말론적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말이 실질적으로 들리느냐에 있다.
지난 주일 예배 후 환담 중에
어떤 신자로부터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
예수의 재림 때 일어날 생명의 완성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긴 하지만
그 생명의 완성이 구체적으로 손에 들어오지 않아서
기다린다는 그 영성에 동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설교자가 청중들의 영적 상태를
좀더 세심하게 이해해야 하며,
설교 내용이 좀더 실질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생명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미완의 생명이 무슨 뜻인가?
리얼리티, 존재, 이데아, 에이도스, 진리, 변증법, 역사 등등에 대해서
평소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상에 충실하게 살아가던 청중들에게
생명의 완성이라는 말은 느닷없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설교가 지식인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어서는 곤란하다.
현학적이어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일상에 매몰되지는 않으나
일상에 두 발을 딛고 선 설교여야 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설교가 과연 가능할까?
더구나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해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만 가야 한다.
그게 설교자의 숙명이다.
그런 길을 묵묵히 가려는 젊은 설교자들을
오늘의 한국교회는 거부한다.
대신 약장사를 요구한다.
그게 오늘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위기라고 말하면
패배주의자의 자기 합리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