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일(일)
바알숭배
오늘 설교에는 바알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히브리어로 ‘헛된 것’은
바알에 대한 언어유희이다.
그것이 왜 헛된 것일까?
그걸 정확하게 아는 것이
오늘 설교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전반에서 중요하다.
그것을 아는 게 쉬울 거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거의 일방적으로
바알 숭배 방식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물질적인 풍요를 신앙의 잣대처럼 생각한다.
거룩한 분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면서도
물질적인 풍요라는 반대급부를 요구한다.
이는 마치 위대한 시인 앞에 가서
당신의 시를 열심히 공부할 테니
그것으로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최소한의 생존을 신뢰한다는 의미이다.
그걸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최소한의 생존만 보장된다면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인식이며 경험이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운지 아닌지는
생명의 차원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비관주의도 아니고 냉소주의도 아니다.
근원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고유한 신앙의 태도이다.
예를 들어 삶을 길이라고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가기 위해서,
또는 더 편리하게 가기 위해서
기를 쓰면 온갖 수단을 다 찾아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길을 간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그런 사람은 걸어가도 좋고
경우에 따라서 차를 타고 가도 좋다.
나비도 보고 벌도 본다.
자신이 길 위의 존재라는 사실에 천착한다.
앞의 사람은 바알을 숭배하는 것이며,
뒤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 생명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다.
이런 정도로 여기에 연루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도대체 무엇인가?
어차피 지금 현실에서 못 누릴 물질의 풍요를 복이라는 이름으로 천국가서 받자...며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예레미아 설교 들으면서도 헛된 것이지만 저도 한번 누리게나 해주세요 하는 마음 강합니다.
지난달 성찬식에는 참여하지 않았었어요. 제가 빵을 먹어도 될까 싶어서요. 그런데 엊그제는 먹어버려서 잘못한것 같고 내내 묵직합니다. 이런 저도 생명에 조금 더 가까워 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