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4일(금)
삶(15)
‘예수 우리의 생명’이라는 문장의 두 번째 의미는
살아있을 때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누린다는 뜻이다.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표현으로는 생명에 참여한다거나
생명이 풍요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병에 걸리지 않거나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죽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실수도 하고 상처 받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외로움도 느끼고 절망하기도 한다.
삶에 우여곡절이 많다.
기독교인이라 해서 늘 삶을 윤택하게 사는 건 아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 보이지 않기에
예수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간혹 열광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
생명을 충만하게 느끼는 포즈를 취하는 이들도 있긴 하다.
매일 교회에 붙어서 살고 찬송을 늘 흥얼거리고
입만 열었다 하면 할렐루야 아멘을 발산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 전도한다.
그런 거야 사이비 이단에 속한 이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이니
그것으로 생명을 실제로 풍요롭게 누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즐거워하는 걸
삶을 풍요롭게 사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기독교인의 생명 경험은 종말론적이다.
종말에 이루게 될 궁극적인 생명에 대한 희망이
지금 여기서 기독교의 삶을 견인해가는 힘이다.
비록 지금 여기서의 삶이 겉으로 시련을 당한다 하더라도
종말에 하나님의 생명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하기에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서 그 생명을 이미 누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종말론적 희망이 생명이라는 뜻이다.
이게 말이 안 된다거나 너무 관념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걸 이 자리에서 당장 풀어 설명하기는 곤란하니,
그건 다른 기회로 미루고 그냥 넘어가자.
그 종말론적 희망의 근거는 바로 예수다.
이런 점에서 예수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종말 생명에 대한 희망의 근거다.
예수를 아는 것만큼 그 희망이 깊어지기에
오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아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예수를 통해서 종말론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생명을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