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4일(월)
어제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를 절대적 생명으로 경험하나, 하고 물었다.
이것은 설교자로서 청중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기독교인 치고 예수가 절대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교회에 다닌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왜 예수가 절대 생명이냐, 하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곤란한 질문이라도
그 대답을 찾는 훈련을 하는 게 좋다.
그런 훈련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깊어질 것이다.
이 질문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일단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이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봐야 한다.
모든 게 다 지나간다.
변하고 낡고 무(無)로 변한다.
이런 생명, 또는 삶은 아무리 양적으로 확장되어도
잠정적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10년을 더 사나 10년 일찍 죽으나,
호화주택에서 사나 임대주택에 사나 차이가 없다.
거꾸로 그게 아주 큰 차이라고 여기고
거기에 모든 삶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착각이다.
하루빨리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게 좋다.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다.
다른 사람들은 접어놓고
기독교인들만 놓고 볼 때
그 착각을 벗어나는 최선의 길은
예수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공부다.
(이런 대답은 다른 경우에도 내가 자주 했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고, 공자 왈로 들일 것 같기도 하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
예수와 부활,
예수와 종말, 재림 ...
이런 주제는 일상에서 거리가 먼 것처럼 비쳐질 것이다.
어떻게 이런 주제를 일상의 리얼리티로 경험할 수 있을지,
그 길을 바르게 아는 게 신학공부 아니겠는가.
이야기가 더 복잡해졌다.
예수가 절대 생명이라는 명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렇게 정리해야겠다.
세상이 재미있는 사람은 그렇게 계속 살면 된다.
억지로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를 보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는 청소년에게
다른 이야기는 씨도 먹히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게 재미가 없는 사람은 오히려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제야 절대 생명으로 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바울의 진술도
바로 그런 시각의 전환을 가리킨다.
제 나름으로 느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은 단지 종교적인 영역 - 기도, 예배, 찬양, 헌금, 교회 - 안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시고
가정, 직장, 사회, 창조세계의 영역과는 무관한 존재로 생각하면서 '세상'에서는 세상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그 나름대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라고 이해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가 '생명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학적으로
'창조의 영성'과 '구속의 영성' 그리고 '종말의 영성'을
전체적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작업을 잘 해야 하지 않을까요?
평소에 생각한 부분을 적어 봤습니다. ^^ 생뚱맞은 이야기인지 모르겠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