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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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결론적으로 말하면 틸리히는 신과 인간, 계시와 이성, 성과 속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통일성을 발견하려고 애썼던 신학자였다.
일반적으로 계시는 초월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이성과는 전혀 무관한 무언가로 이해되어 왔었는데, 틸리히는 계시를 이성에 반하는 것이 아닌 이성에서 잇닿아 초월하여 넘어서 있는 것으로 보았다.
(틸리히가 계시와 이성이라고 이야기할 때의 “이성”은 기술적 이성이 아닌 존재론적 이성을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추론적 이성이 아닌 직관적 이성이란 말이다. 그러나 고래로 기독교 신학은 추론적 이성, 즉 기술적 이성의 때가 얼마나 많이 묻어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기술적 이성은 끝없이 나누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존재론적 이성과 그에 잇닿은 영성은 끝없는 하나됨과 일치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곱씹어볼 일이다.)
이성이라는 것이 주객 도식의 차원이라면 계시는 주객의 도식을 넘어서 탈아(脫俄)의 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계시를 초이성, 즉 탈아적 이성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다.
또한 더불어 계시라는 것이 역사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틸리히는 ‘종교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가 말하는 종교는 외형적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이다.
그래서 틸리히가 말하는 의미의 종교에서는 외형적인 그 무엇을 가지고 있더라도 궁극적인 관심이 그 안에 들어있지 않다면 그 것은 종교가 아니다. 그 것은 바로 유사종교다.
그래서 유명한 틸리히의 명제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라는 이야기 속에는 외형적 종교는 엄밀히는 종교를 담고 있는 문화적 형식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틸리히는 미술, 음악, 철학, 사상 등의 모든 문화는 종교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문제다.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이라는 문제도 하나의 궁극적 관심, 즉 계시를 표현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보았던 것 같다.
정통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구원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야말로 계시의 알맹이이겠지만, 틸리히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형식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 가 중요했던 듯 하다.
현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상징하는 문화를 벗어난 다른 문화들과의 대결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슬람을 비롯한 타 종교와의 대결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그런 유일성이라면 애초에 번짓수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틸리히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형식은 어떤 다른 궁극적인 관심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거 같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자체" (Existence Itself)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실존주의에서 차용해온 것 같은데, 존재 자체라는 말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실존적 존재가 아니란 이야기다.
실존의 특성은 유한성, 소외, 불완전성, 그리고 길 잃어버림, 던져짐이 특징이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실존적 상태야 말로 바로 죄의 상태인 것이다.
실존은 다시 말하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나의 현실적 존재를 말한다.
그 실존은 존재자체로부터 떨어져 있는 현실적 존재인 것이다.
틸리히가 존재자체로 해석한 “신”의 특징은 無 이고 힘이다.
또한 그 신은 존재의 뿌리이고, 또한 틸리히가 강조하는 창조성이다. (틸리히가 창조성이라고 표현할 때에는 창조가 시작된 이후 완결되지 않고 완성을 향하여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틸리히는 신은 존재가 아니므로 우리가 “상대방”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그래서 틸리히는 기도라든가, 미사라든가, 예배라든가 이러한 것들을 궁극적 관심을 향한 연극적 장치라고 보았던 것 같다. 연극이 허구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 이라는 이름은 실재의 그림자, 그리고 잠정적인 명칭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위의 하나님” 을 이야기 한다.
틸리히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훼손시켰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심지어는 그를 무신론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틸리히 스스로도 유신론(有神論)의 신은 버렸다고 했다.
틸리히의 시대 구분도 재밌다.
그는 시대를 타율의 시대, 자율의 시대, 신율의 시대로 나눈다.
타율의 시대는 중세의 신본주의의 시대를 말한다. 즉 어떤 규칙과 규범으로 인간을 옭아매던 시대, 또한 현대에도 지금의 이슬람 국가들이 처한 시대를 말한다.
자율의 시대는 근대의 자유주의의 시대를 말한다. 그 자율의 시대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기대와 낙관을 하다가 폭삭 망한 시대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시대를 신율의 시대라고 이야기 한다. 신율의 시대는 타율과 자율을 넘어서서 자율 속에 드러나는 신의 섭리를 발견하는 시대를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율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고 틸리히는 이야기 한다.
틸리히로부터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의 개념이 나오는 듯도 하다. 틸리히의 입장에서는 외형적 기독교도 심층 종교를 품고 있는 표층 종교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틸리히를 종교 다원주의의 시원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틸리히는 그 점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고 한다.
틸리히의 견지에서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또한 기독교 교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피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창조, 원죄 - 틸리히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 , 십자가의 대속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부활, 종말에 관해서 기독교는 제대로 된 해석을 내놓지 않았고, 단지 알아듣지도 못할 논리 싸움에만 열중해 왔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불교에 관해서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다르마(최고의 법)”은 섭리적인 면이 전혀 없고, 어떤 지존의 원리적인 측면만을 가졌기 때문에 탈역사적이라고 파악한다. (불교에서는 그 “법”을 체화한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물론 불교도 소승에서 대승으로 보편종교화 하면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이데아적이다.
틸리히가 볼 때 기독교는 철저히 역사적인 종교이다.
그럼에도 틸리히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그의 관심은 오로지 “그 외형적 종교가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틸리히가 말하는 궁극적 관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이신 존재자체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것은 역사 속으로의 참여와 관계성의 회복으로 드러난다.
또한 존재 자체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실존적 존재들이 개체성이라는 소외를 넘어서 일치를 경험하며 하나가 되는 관계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사랑이다.
물론 그 것은 우리 힘으로 가능한 건 아니다. 존재 자체의 힘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틸리히는 예수를 어떻게 보았는가?
틸리히는 예수의 몸은 실존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예수는 역사 속에서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스스로가 지녔던 “새로운 존재” 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 “새로운 존재”는 이미 존재자체의 본질과 통하였기 때문에 그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가능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게 묘하게도 에크하르트와 통하는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 “아들”을 낳으신다고 이야기한다. 그 아들은 영혼 속에 탄생한 새로운 존재이며, 틸리히의 견지에서 말하자면 그 영혼 속에 아들이 너무나 뚜렷이 드러난 분이 바로 예수다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예수는 성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외아들, 또한 맏아들이다.)
틸리히는 역사와 궁극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고 보았다. 궁극과 역사가 따로국밥이 될 때, 궁극은 사라지고 역사는 개판이 된다고 보았다.
괴발새발 쓴 글이라 결론이 너무 빈약하지만... 결론이 뭐가 중요한가... 내가 느낀 점, 할 말만 하면 되지 ㅋㅋㅋ
어쩔 수 없는 세컨더리 경험이지만, 틸리히 경험은 참 강렬하네요...
저의 주된 관심사와 딱 맞아떨어졌다고 할까요? 불트만까지도 크게 공감된다는 수준이었는데, 틸리히는 마치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 미리 알고 나에게 다가와서 이야기를 풀어내주는 것처럼 강렬했어요...
1000년의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와도 거의 같은 지점에 서있는 느낌이었구요...
틸리히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 기독교는 여전히 표층 종교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 목사님도 기독교라는 큰 틀 속에서 심층 종교를 추구하시는 모습이 항상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언제라도 한 번 뵐께요... (항상 말뿐인 것이 죄송합니다만 ㅜ ㅜ)
신학공부를 열심히 하시는군요.
힘이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두달도 채 못 남은 금년 한 해,
가족과 더불어 모두 잘 지내세요.
주님의 평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