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7일(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첫 구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다.
여기서 아버지를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아버지 개념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아버지라는 표현의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를 조금 돌봐줄 수 있을 뿐이지
우리의 운명을 책임질 수는 없다.
이 구절에서 따라가기 조금 힘든 표현은 ‘하늘’이다.
고대인들은 거기서 공간으로서의 하늘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런 공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도
가 닿을 수 없는 궁극의 어떤 세계를 가리킨다.
그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인식, 개념, 언어, 합리성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세계이기에 하늘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움의 의미>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누멘적인 것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누멘적인 것은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그것이 두려운 이유는 우리의 이성적 합리성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은 도처에 널려 있다.
왜 어떤 이들은 장애를 안고 태어나서 평생 고통을 받는지,
전쟁 중에 죽거나 다치는 아이들이 왜 생기는지,
왜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고 없는 것은 없는지 등등,
그 모든 것들은 우리를 두려움에 빠지게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거룩한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했으며,
그것을 알게 하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곧 예수를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오늘 우리가 실제로 알고 믿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하나 든다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에게서 누멘적인 것,
즉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