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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일(목)
성경 텍스트에 충실할 것
어제 ‘새해 달력’이라는 제목의 묵상에서
설교에 충실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를
네 가지로 말했다.
어디 이 네 가지만이겠나.
기도, 회중들과의 대화, 책읽기 등등,
더 많은 요소들이 필요하지만
최소한의 조건만을 말한 것이다.
이 네 가지를 보충해서 설명해야겠다.
설교자에게 성경 텍스트는
마치 바이올린 연주자의 악보와 같다.
연주자는 악보에 일단 충실해야 한다.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서 악보를 무시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해서 악보를 기계적으로 재생하는 건 아니다.
그런 건 컴퓨터가 더 잘한다.
훌륭한 연주자는 악보에 복종하되 자유롭다.
거꾸로 자유롭되 복종한다.
복종과 자유의 긴장을 팽팽히 유지해야만
그의 연주는 창조적인 차원으로 들어간다.
성경 텍스트에 충실하다는 것은
거기에 문자적으로 매달린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문자가 지시하는 어떤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야 한다.
대개의 설교자는 문자가 지시하는,
또는 문자 너머에 있는 어떤 세계를 모른다.
그런 사태 자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설교는 가능하다.
청중들은 더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모른다는 뜻이다.
단순히 낱말만 남아 있고
낱말 너머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과도한 수사학에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다.
웃기고, 울리고, 감동 먹게 하고...
설교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텍스트(근본)에 충실해야하지 않을는지.
목사님!.
저는 송구영신예배때 전도사님이 전도서를 읽는 내내 속으로 울었습니다.
콧물이 눈물이 나오는데 참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지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먼 이별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날의 성경말씀으로 위로를 해드렸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가 있었으니 죽을때가 있겠고~부터 시작하여 안을 때가 있으면
안는 일을 멀리 할때도 있는데 보내드리는 마음 너무 슬퍼하고 아파하지 마라
이런 부분조차 성경을 오독한건 아닌지?
삶의 모든 부분이 신앙과 연결이 된다는 목사님의 말씀에 너무 집중했나봅니다.
성경의 좋은 구절을 삶과 연관지어 본다는것도 너무 문자적으로만 치우침이 된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문자 너머의 세계에 진입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