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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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실증적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이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이루어져있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존재하는 것들은 변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몸의 원자의 98%가
1년 안에 교체된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지금 나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의 대부분은 다른 물질(혹은 생물)을 구성하는 원자였다는 것이다.
좀 더 멀리 바라보자. 지금 나의 몸을 구성하는 원소의 전부는
과거 다른 물질(혹은 생물)의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죽으면 내 몸을 구성하는 모든 원소가 해체되어서,
다른 물질(혹은 생물)을 구성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나무로 존재했던 물질들이
시간이 지나서 현재 석탄으로 존재한다.
조금 전에 액체로 존재했던 것들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을 이룬다.
고립계 안에서는 열역학 제 2법칙이 적용된다.
지구 전체를 보면 엔트로피가 증가할 것이나,
지구의 일부분에서는 일시적으로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현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물질 혹은 생명체을 이루고 있던
원소들이 해체가 되었다가 다시 물질 혹은 생명체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의 윤회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윤회는 생명의 한계를 가리킨다.
생명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따라 생명체는 없어진다.
이러한 사실 앞에 ‘나’란 무엇인가? ‘나’는 존재하는가?
뇌 작용에 의한 자의식만이 있는 것인가?
영혼이 ‘나’인가? 헬라의 관념인 영육이원론으로 바라보지 말자.
영육이원론은 헬라의 관념이지 히브리 관념도, 성서의 관념도 아니다.
바뀌지 않는 ‘나’라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항상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自存者로서의 나는 없다.
단지 ‘어떤 힘’이 나를 구성하고, 너를 구성하고, 우주를 구성할 뿐이다.
‘어떤 힘’에 의하여 늘 변화함 가운데에 있었을 뿐이다.
성서는 ‘그 어떤 힘’을 하나님이라고 한다.
나를 나로 유지하게 하는 존재이다.
생명의 메커니즘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다.
구약성서는 우리의 존재의 근거를 ‘영’이라는 개념으로 진술한다.
여기서 ‘영’이라는 말은 헬라의 관념인 ‘육’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다.
창조의 힘이며, 생명의 숨결이다.
창조설화에 보면 하나님은 흙먼지에 숨(‘영’과 동의평행)을 불어넣어서
사람(생명체)이 되었다고 한다.
또, 구약성서의 도처에 나오는 ‘영’은 생명을 창조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 영을 주시는 존재가 하나님이다.
결국 하나님이 없이 ‘나’의 존재도, 생명도 없다.
성서는 ‘나’를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완성(재창조, 부활)하신다고 증언한다.
그 완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자가 모였다가 해체되는 방식의 극복이다.
윤회의 극복이다.
바울 사도는 새로운 방식의 생명을
‘하늘’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바울 사도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빌 3:20~21, 개정공동)”
P.S.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말한 건 아닙니다.^^;
불교 내에서 윤회를 다루는 관점들도 다양하고요. 용어만 빌려왔어요.
'나'는 곧 시간이다. '나'라는 실체가 공간을 만나지 못한다면
사는 것, 곧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침일찍 일어나
현관문을 박차고나가 세상이라는 공간과 만나야한다.
요즘 왠일로 이런 고차원적인??ㅎ 생각을 했다 했는데
앤크리스토님의 깊은 성찰이 담긴 글을 읽으니
와 이게 바로 '생각'이라는 거야,라는 생각이 듭니다.ㅎ
임신한 여성의 양수가 하루에 8번 바뀐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그만큼 인간의 몸은 신비롭습니다.
늘 좋은 것으로 좋은 생각으로 '윤회'되도록 살면
좋을텐데요..
날마다 정신차리며 잘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