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에서는 기도의 목적이 감정적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결핍이 아니라 존재론적 필연성이며, 사람의 본질 자체를 구성하는 행동이다. 전혀 기도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완전히 사람이 아니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존재론이 기도를 설명해준다. (162쪽)
헤셸의 위 문장을 A4 용지 10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일단 글을 쓸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다. 재미있으라고 한 말이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기도의 ‘존재론적 필연성’이 무슨 뜻인가? 기분이 찜찜할 때 교회당에 가서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또는 작은 소리로 기도하면서 한바탕 눈물을 흘리면 개운해지는 걸 경험할 것이다. 기도가 감정적 결핍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눈물 나오는 기도가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걸 가리킨다. 그런 기도는 일종의 신세타령이다. 이런 방식으로 기도에 접근하면 결국 기도는 주문(呪文)이 되고 만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신세타령을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깊이 기도하는 사람은 신세타령이 머물지 않고 다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은 신세타령에 떨어지지 않을뿐더러, 어쩔 수 없이 그런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다시 빠져나온다. 이런점에서 기도는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존재론적 근거라 할 수 있다. 즉 기도는 숨쉬기와 같다. 영은 숨과 같은 단어(루아흐)이니, 이게 말이 된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나는 기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유대교에서는 기도의 목적이 감정적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결핍이 아니라 존재론적 필연성이며, 사람의 본질 자체를 구성하는 행동이다. 전혀 기도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존재론이 기도를 설명해준다.
너무 좋은 말이어서 저도 베껴보았습니다. 무엇을 갈구하거나 중언부언하거나, 이런 기도만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제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는가 봅니다. 저도 존재론적 필연성에 의한 기도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때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