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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달가워하지 않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서 찾는다는 사실에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겉으로는 이게 말이 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덕을 아무리 높이 쌓는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런 노력은 우리를 좌절하게 하거나 교만하게 만든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충분히 해명했고, 루터도 오직 믿음과 오직 은총이라는 신학 개념에서 분명하게 언급한 칭의(稱義)에 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실제로는 의롭지 않지만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에 근거해서 수행을 외면하는 건 칭의에 대한 오해일 뿐만 아니라 수행에 대한 오해이기도 하다. 칭의는 업적주의에 대한 경고이지 삶을 무게를 배제하는 게 아니다. 삶이 배제되면 소위 값싼 은혜에 떨어지게 된다. 수행을 율법으로 보면 곤란하다. 수행이 오히려 복음이다. 수행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업적주의를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영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수행은 칭의의 인식론적 토대이고, 칭의는 수행의 존재론적 근거다. 칭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만이 삶을 수행으로 여길 수 있다.
세월호 사태를 보면서 수행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자신를 힘들고 어렵고 손해보게 할 지라도 옳은 것이면 행하는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신학자들과 교회에서 곡해한 이신칭의를 맹목적으로 믿고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현실을 볼때 희망을 찾기가 힘듭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카톨릭이 스스로 개혁하기를 바라는 것보다 현재의 교회가 개혁하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개혁이 가능한가? 왜 대부분의 깨어있는 교인들은 제가 보기에는 불가능한 현재 교회의 개혁에 매여 있는가?
자신들이 속해있는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인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교회를 부정 했을 때에 오는 불이익 때문인가?
어떻게 보면, 현재의 교회 이후를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합니다.
"새 술은 새부대에" 라는 말씀이 다시 한번 떠 오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