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기독교 근본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지만,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기독교 세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주일학교 학생들과 중고등부 학생들, 대학부와 청년들을 지도했고, 그리고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활동했다. 기독교를 잘 몰라도 교회 활동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목회의 진정성만 확보되면 목회의 성과도 어느 정도는 보장된다. 더구나 운이 따르면 목회 성공도 가능하다. 목회 성공이 모두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목사의 능력만도 아니다. 운이 크게 작용한다. 그러니 목회에 성공한 분들은 ‘내가 운이 좋았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게 좋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기독교를 정보의 차원에서만 안다는 뜻이다. 그건 사실 아는 게 아니라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런 수준에서 목사로 살았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예컨대 여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는 베드로의 고백이 있다고 하자. 이걸 정보로만 아는 것과 리얼리티(reality)로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 문장에는 네 개의 단어가 있다. 주,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이다. 각각의 단어는 인류 역사의 무게가 담겨 있다. 일단 그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네 개의 단어가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기독교 신앙의 더 깊은 세계까지 찾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만 보자. 도대체 하나님이 아들을 둘 수 있을까? 그런 것은 헬라 신화의 제우스에게나 해당된다. 성서의 하나님은 이름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초월하시는 분이다. 모세의 호렙 산 전승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 불린다. 히브리 원어로 그것은 ‘나는 나다.’는 뜻이다. 그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로서 창조와 종말의 영이시다. 이런 하나님께 아들 운운하는 것은 신성 모독적이다. 그런데도 그런 표현이 성서에 나온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인 시편에도 나온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그런 표현이 성서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신학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만이 아니라 성경과 기독교의 모든 것들이 다 이런 깊이가 있다. 칭의도 그렇고, 삼위일체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모르면서도 공부하지 않는 목사라고 한다면 그는 근본적으로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그 단어가 기록될 상황과 담긴 뜻의 심오함을 안다면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인지 여기서 쬐금씩 알아감니다. 유대인이 성경필사를 하다가 하나님이름을 적을때 목욕재개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중요헌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