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보면 목사에게는 공적인 업무와 사적인 업무가 있다. 공적인 업무는 목회 전반에 걸친 일이고, 사적인 업무는 그 외의 일, 즉 목사로서가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활동하는 영역이다.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이 겹치는 부분도 없진 않다. 기도생활이나 성경읽기 같은 경건생활, 또는 앞에서 강조한 책읽기 등은 목사로서만이 아니라 한 자연인으로서, 또는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에 속한다. 사적인 업무에 대한 설명은 가능한 뒤로 미루겠다. 우리의 관심은 우선 목사가 교회에서 공적으로 감당해야 할 업무다.
목사의 공적인 업무를 대충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예배 준비와 인도, 성례전 집행, 성경공부 지도, 심방과 상담, 각종 회의 주재와 참석, 행정사무 지도, 지역사회 봉사활동 등등. 나는 이 모든 항목들을 차례대로 따라가면서 설명하지는 않겠다. 목회의 실천 방법론을 제시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사의 업무를 말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목사의 정체성, 즉 목사의 영적인 내공을 쌓게 하려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목회의 기술(technique)을 제공하려는 게 아니라 목회의 예술(art)에 들어가라고 권고하려는 것이다.
목회의 기술과 예술의 차이는 작다면 작지만, 그래서 그걸 구분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크다면 크다. 상당수의 목사들이 목회를 기술로만 여긴다. 진정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진정성을 갖추고 있어도 발상 자체가 기술의 차원에 떨어져 있으면 결국 목회의 중심은 흔들리고 만다. 목회를 기술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끊임없이 기술 개발에 집착하게 된다. 기술이 바로 목회 자체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목회의 기술이 교회의 모든 것을 압도한다.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끝없이 생산된다. 효율성이 떨어지면 다른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개발된다.
목회를 예술의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영에게 집중한다는 뜻이다. 그 영은 성령이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기도 하다. 그 영에 의존할 때만 목회는 창조적일 수 있다. 그 창조가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이런 말이 실제로 느껴지지 않는 목사들도 있을 것이다. 기술적인 목사들도 자신들이 성령을 따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기술적인 목회는 소유 지향성에, 예술적인 목회는 존재 지향성에 그 특징이 있다. 존재 지향성의 목회에 들어간 사람은 목회의 참된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