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이 각인된 돌판을 받은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첫 번 돌판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서 모세가 성질을 내다가 던져서 깨뜨렸다. 그 후에 하나님은 다시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주신다. 이 두 돌판 사건 사이에 특별한 이야기가 나온다. 금송아지에 마음을 쉽게 빼앗기는 이스라엘 민중을 이끌고 광야횡단과 가나안 입성을 시도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좀더 확실한 보장을 얻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뜻이다. 모세는 그게 제 죽을 일인 줄 몰랐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모세의 심정을 헤아리신 하나님은 결국 모세를 반석 틈에 숨겼다가 자신의 영광이 지나간 뒤에 그걸 느끼게 하셨다. 출 33:22, 23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영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카봇을 루터는 헬라어 독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Herrlichkeit로 번역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면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간 흔적만 느낄 뿐이다. 출애굽기 기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 본다고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과 등을 사실적인 것으로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궁극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는 메타포다.
모세는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등이라고 여긴 것일까? 실제로 하나님의 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본 것도 아니겠지만 뭔가를 경험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겠는가. 그가 경험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다. 모세가 오른 시내 산에서 벌어진 현상들이 그것이다. “산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출 24:17). 모세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존재의 신비, 역사의 신비, 자신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어떤 압도적인 힘을 예감했다. 그 힘이 자신들의 운명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놀라워했고, 동시에 그 사실에서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했으며, 후손들에게 영광 찬송을 부르게 했다.
인간들의 뜨거운 찬양과 기도 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영광이라는 빛이 성령의 도움으로 성도가 인식했을 때,
그 빛을 다시 하나님께로 반사(?)시키는 것을 "영광 돌린다"라고 생각해도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