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제도 및 경제 윤리 문제를 일시에, 그리고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왕도는 없다. 기독교가 말하는 원리와 규범을 잘 알아도 현실에서는 그게 잘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현실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라는 것도 바람직한 게 아니다. 모든 것을 복합적으로 판단하면서 교회 형편에 가장 적합한 길을 찾아가는 게 최선이다.
여기서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그것은 완성된 게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중에 있다. 그래서 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이 막연한 건 아니다. 분명한 방향이 있다. 그 방향을 붙드는 게 신학공부다. 신학공부를 충실하게 한 사람은 그 방향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것을 실제로 추진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일단 방향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다. 그 관계가 깊어지는 정도에 따라서 헌금과 경제 윤리 문제도 방향이 잡힐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가 자신의 운명에서 현실(reality)로 경험되면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돈은 그 궁극적인 지위를 잃게 된다. 예를 들어, 호흡을 현실로 경험하면 무얼 먹느냐, 어떤 집에서 사느냐 하는 문제들은 부수적인 차원으로 떨어지는 거와 같다. 십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명제가 첫 계명으로 제시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이며,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헌금이 일종의 상품처럼 취급되고, 기독교인의 경제 윤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낫지 않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말씀을 허투루 듣는다는 의미다. 단적으로,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건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어렵다. 그러니 믿음을 자랑하지 말고 겸손하게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면서 살아야 한다. 목사도 큰소리치지 말고 겸손한 목회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우리 목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