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체설과 임재설
성찬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신학적으로 예민한 주제였다. 다른 부분에서는 서로 생각이 통하면서도 성찬에서는 차이를 좁히기 어려웠다. 로마가톨릭을 포함해서 그런 차이를 특징적으로 크게 나누면 화체설, 임재설, 상징설(또는 기념설)이 있다.
로마가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한다. 사제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축성하는 순간에 빵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말이 안 된다. 사제가 축성해도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그대로 포도주이지 그것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개신교의 입장에서 자칫 주술적인 것으로 보이는 화체설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매도할 필요까지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성과 인성이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도 하나라는 사실 자체가 신비인 것처럼 빵이 몸의 관계도 신비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화체설을 거부하고 임재설을 주장했다. 빵과 포도주가 질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 또는 공재한다는 뜻이다. 개혁자들 중에서 루터가 성찬 문제에서만큼은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루터를 반대했다. 이 두 사람의 성찬 논쟁이 1529년 10월1일-4일 독일 중부 도시 마르부르크에서 열린 종교회담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회담을 소집한 군주의 기대와는 달리 이 두 사람 사이에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다. 츠빙글리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문장에서 ‘... 이다.’를 ‘... 상징한다.’로 해석했다.
성찬 문제는 결국 용어 이해에 달려 있다. 로마가톨릭의 스콜라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빵과 포도주라는 질료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형상을 담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이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즉 임재하신다고 말한다. 그 말을 실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통치가 거기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임재 한다는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거나, 예수의 구원 사건을 기념한다고 말해도 틀린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