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송예전
예배의 마지막 단락은 <파송예전>으로서 마침찬송, 위탁의 말씀, 축복기도, 후주로 구성된다. 파송은 예배에 참석했던 회중들을 세상으로 보낸다는 뜻이다. 이것은 기독교 영성에서 중요하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다가 중간에 잠간 예배드리기 위해서 교회당에 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다. 예배 중심의 삶으로부터 세상으로 파송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 잠시 교회라는 종교적 영역으로 도피하는 게 아니라 교회로부터 세상으로 담대하게 나가는 것이다.
<파송예전>의 네 항목 중에서 축복기도 한 항목만 보충 설명하자. 축복기도와 관련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목사가 과연 복을 줄 수 있는 영적 권위가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이건 예배의 축복기도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목사의 영적 권위 전반에 걸친 질문이기도 하다. 목사는 과연 일반 신자들과 비교해서 질적으로 더 거룩한 존재냐, 그래서 일반 신자들에게 없는 어떤 특권을 갖고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개신교 전통에 따르면 그건 가능하지 않다. 소위 평신도나 목사나 똑같이 세례를 받은 사람일 뿐이지 질적으로 다른 건 하나도 없다. 어떤 목사들은 축복권만이 아니라 저주권까지 목사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다만 예배에서 목사가 중보기도를 하듯이 하나의 의식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대신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은 가능하다. 일종의 강복(降福) 개념이다. 그러나 개신교 정신을 더 살린다면 하나님의 복을 바라는 기도라는 뜻의 축복(祝福) 개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직주의와 기복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하여 이런 순서를 아예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다른 하나는 축복기도의 문구다. 교단에 따라서 다르다. 삼위일체 이름은 똑같이 들어가지만 마지막 술어 부분은 뉘앙스에서 차이가 난다. ‘... 할지어다.’와 ‘... 하기를 축원하나이다.’다. 앞의 것은 강복 개념이, 뒤의 것은 축복 개념이 강하다. 나는 ‘... 하기를 축원합니다.’로 한다. 예배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좀도 정교하게 정리해서 신학적으로도 정당하고 한국교회 정서에도 맞는 대안을 찾아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