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직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목사가 하나님을 전하려면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직면한다거나 경험한다는 것이 손에 잡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목사 자신도 그렇고 회중들도 지금 설교하는 목사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인지 분간하거나 판단하기 어렵다. 자기 자신도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웬만큼 영적인 시각이 열린 사람은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은 영 분별의 은사에 속한다. 일단 비유를 한 가지 들겠다.
여기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정상까지 8천8백48미터를 오르는 동안에 그는 여러 모습의 에베레스트를 경험할 것이다. 모든 모습이 다르다. 대충 눈요기만 하는 사람의 눈에는 큰 차이가 보이지 않겠지만 눈썰미가 날카로운 사람의 눈에는 한발자국 뗄 때마다 모든 장면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그가 경험하는 각각의 장면은 다르지만 모든 장면이 에베레스트 산이다. 거기에 오른 계절에 따라서 달라 보인다. 시간에 따라서도 달라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한번 정상에 섰다고 하더라도 에베레스트를 다 아는 게 아니다. 다시 오르면 그 산이 또 새롭게 다가온다. 그래서 참 산악인이라고 한다면 산에 오르는 과정 자체를 늘 새롭게 경험하면서 동시에 산에 압도당한다.
사이비 산악인도 없지 않다. 그는 책과 동영상과 남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섞어서 산에 대해서 대중 강연을 할 수 있다. 입담이 좋으면 실제로 에베레스트를 올라간 사람보다 더 실감나게 전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돈도 제법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에베레스트를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적당하게 눈속임을 할 수 있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리고 언젠가는 그 정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나님 경험은 일종의 에베레스트 산 등반 경험과 같다. 우리 설교자들은 영적인 전문 산악인이다. 자신의 경험을 아마추어 등반가, 또는 산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생생하게 전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실제로는 에베레스트에 올라간 본적이 없으면서도 남의 이야기만 듣고 전문 산악인 행세를 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설교하는 목사들도 많다. 당분간 남의 눈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리고 언젠가는 그 정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재주가 있어 살아있을 때 발각나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때는 여지없이 정체가 탄로 날 것이다.
오늘 새벽에 시편 119편 중에 있는 말씀을 들었기에 목사님 시편강해를 열었더니 마침 이런 글이 있네요.
"올라가는 힘든 과정, 올라갔을 때의 희열, 이런 것들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거든요, 그들은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거기서 경험합니다. 놀라운 삶의 충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과연 충분한가 하는 겁니다. 맨 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서 살 수는 없잖아요, 올라갔다 내려와야 됩니다. 올라가 있는 순간은 오히려 짧고요, 희열의 순간은 짧고요, 실제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야 되거든요, 그러면 올라가 있을 때만 어떤 삶의 희열을 느끼고, 내려와 있을 때는 또 공허하다면 그건 생명이 충만하다고 말 할 수 없는 거지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생명을 온전하게 채울 수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