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당함
위에서 나는 산악인과 목사의 공통점이 그 대상으로부터 압도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압도당한다는 것은 논리와 이성과 감정을 포함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모든 것이 포기될 수밖에 없는 어떤 절대적인 사태를 가리킨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목사 역할은 감당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험에서만 그 역할이 가능한 목사로 살기는 힘들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압도당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와 비슷한 것들을 불편하게 여긴다. 자신을 주체로 여기며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자기를 확대하는 방식으로만 삶을 이해하고 경험한다는 말이다. 요즘 흔히 회자되는 단어가 다 그런 것들이다. 긍정, 확신, 적극적 사유, 출세, 스펙, 경쟁, 연봉, 대기업, 일류대학 등등, 모든 사람들이 자아를 강화하고 확대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것이 지구의 차원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자리 잡았다. 지구를 인간 중심으로 개발하는 것을 문명, 또는 발전이라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신앙마저도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압도당한다는 것을 기분 나쁘게 여긴다.
하나님께 압도당하는 것을 소극적인 삶에 대한 신앙적 변명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하나님께 압도당한 사람들은,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은둔하는 수도승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일단 겉으로 소극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압도당함으로써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 산에 압도당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께 압도당한 목사도 역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그는 아무리 신앙심이 깊고 인격적으로 고상해도 하나님을 설교할 준비가 덜 된 사람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계시다니,
닉네임이 멋지군요.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거니까
하나님으로부터의 압도당함도 당연하지요.
예수 사건도 어떤 사람에게는 압도당함으로 나타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그렇고 그런 것으로 느껴지고 맙니다.
그런데 마음이 힘들 때 경험하는 것과는 구별하는 게 좋습니다.
이런 거는 옆에서 누가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줘도 해결되는 거잖아요.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누미노제의 경험,
바르트가 말하는 절대타자의 경험,
또는 백척간두와 비슷한 게 압도당함입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며칠 동안 설명하게 될 겁니다.
좋은 하루!
너무 일찍 하산하라하시어
다시 등반부터 읽어보고 있는데요...ㅎㅎ
여기서 압도당함이란 바르트 선생님의 휩쓸림과 같은 개념인 것이죠?
그렇다면 압도당함의 대상은 하나님 자체의 경험에 대한 것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것인가요? 아니면 둘 모두를 포함인가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죽는다고 했으니 후자인가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그 실체에 조금씩 접근해 가면서 생기는 현상인가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곧 하나님이라고 배운 것 같은데...
그렇다면 하나님 경험이 일시적이라는 오늘 묵상글은...
곧 온전한 실체에 대한 경험이 일시적이지만 가능하다는 것인가요?
오늘도 우문현답해 주시라 믿으며~ 평안한 하루 되십시오~^^
오랜만에 다비아에 들릅니다. 압도당한다.. 하나님께 압도당하는 것은 개인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신앙적 경험으로도 가능 한 것일까요? 어떻게 보면 마음이 힘들때 심리적인 경험에 의해 종교적인것에 의지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찌보면 압도당한 것일까요? 압도당한 것은 무한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