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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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사건이 한참(?) 전의 일이고 글도 한 달 전에 쓴 거지만,

오랜만에 로그인한 김에 올려요.

시시하고 잡된 글이지만요.^^;



 1. 문창극 총리 지명자의 발언과 한국 교계

문창극 총리 지명자(이하 문 씨)의 발언에 대하여 며칠 째 비판 여론이 들끓고 있다. 식민사관에 근거한 역사관, 일제강점기에 대한 긍정적 발언 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문 씨는 온누리 교회의 리더십 스쿨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식민지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 조선 민족의 상징은 게으른 것이다.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거, 이게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다.”

문 씨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커지자, 보수 기독교 단체인 한국교회연합(한교련)에서는 문 씨의 발언을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발언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며칠 뒤 대형교회 원로 목사 등을 포함한 많은 교계 인사들이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이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문 씨 발언을 신앙적 민족사관이라 칭하며 옹호했다.

문 씨를 위시한 교계 인사들의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내에서도 소수의 생각만은 아닌 것 같다. ‘일제강점기’라는 특별한 소재가 연관이 되어서 기독교 내부에서도 적지 않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많은 한국 기독교 신자들의 세계관은 문 씨의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낙엽 한 잎도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며, 세상의 사소한 것들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 말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연결 짓다 보니 이러한 발상이 나온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은 압제받는 이들의 고통의 배후를 하나님께 두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2. 성경 읽기와 세계관

왜 이러한 터무니없는 발언이 온누리 교회와 한교련 등 한국 교회에서 먹힐까 생각해보다가 구약성경 한 권이 떠올랐다. 문 씨의 발언은 하박국서(書)를 생각나게 한다. 하박국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를 시켜서 부패하고 부조리한 유다를 멸망하게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정의가 무너지고 법은 무용지물이 된 유다를 심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의 군사를 일으키셨다는 뜻이다.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바빌로니아의 거병(擧兵)과 지배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성경 읽기는 일제강점기도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성서를 역사비평, 문서비평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내용을 교조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많은 한국 기독교 신자들은 구약성경을 축자영감식으로 이해하여서 — 특히, 신명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 인과응보식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 여김으로써, 역사를 하나님의 심판에 따른 인과응보의 원리로 바라본다.

이러한 논리가 발전되면,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실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기도 한다. 예컨대 자신의 계획이 번번이 좌절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실패하게 하셨다고 생각한다. 또 자신의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불가항력적이게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시각은 인간의 책임적인 태도를 잃게 만들 여지가 있다. 이러한 시각은 잘못된 기득권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최근 담임 목사의 문제를 두고 반으로 갈라진 한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담임 목사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누어져 있다. 찬성하는 쪽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가면, 만일 담임 목사가 잘못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이대로 목회를 하게 내버려두시겠냐고 반문하면서, 여전히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논리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이 만들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하박국서만이 아니다. 여호수아서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수아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의 여러 민족들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몰살하라고 명령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신(神)은 자신의 뜻을 위하여 살상과 억압을 일삼는 폭력적인 신(神)이란 말인가.

이러한 생각을 긍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생명을 경시했던 기독교의 역사적 과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고유한 다스림을 전하는 것은 맞지만, 성경에서 진술하는 모든 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는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성경에서 쓰인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성경은 매우 모순적이고 이를 경전으로 삼는 종교는 해괴망측한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인류 역사에서 쓰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므로 쓰일 당시 — 구전되고 편집되던 때를 포함하여 — 상황과 문화 그리고 세계관을 고려해야 한다. 성서의 기자 또한 사람이기에 그 당시의 문화와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기자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과 그 세계관을 매개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작업 없이 성경을 읽으면 당시의 세계관을 보편적인 진리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성서가 구전되고 편집되고 기록될 때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은 제쳐두고, 그 시대의 세계관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시키다 보니, 비(非)기독교인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성경 기자의 세계관과 전하고자 하는 바를 칼로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을 하지 못할 때가 있겠지만, 할 수 있는 대로의 노력을 해야 한다.

 

아무래도 하박국에서 말하는 바를 간략하게 짚어야겠다. 기본적으로 하박국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고백하지만, 어디까지나 구원 지평에서의 주권이다. 다시 말해서 하박국의 초점은 억압과 압제 등의 불의를 멸하시고, 정의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는 신실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의 군사를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은 중심 주제가 아니라 핵심 내용을 전하기 위한 틀, 즉 당시 세계관이다. 과일을 담는 바구니가 아니라 과일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는 하박국에서 표현된 세계관이나 역사관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을 읽어내야 한다.

 

3. 불의한 세상과 하나님의 다스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세상에는 악이 활개를 치고, 고통과 슬픔, 고난이 존재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이라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정의로우며 생명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슬픔과 고난이 없어야하지 않을까?

우리는 악의 기원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성경도 악의 기원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성경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라 할 수 있는 죄가 인간의 삶을 뒤덮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악과 죄의 근원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인간은 죄와 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잘못된 선택이 고통과 슬픔 그리고 고난을 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역사에서 펼쳐지는 일들을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는 방식으로 — 고난과 슬픔 그리고 그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없애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고난과 슬픔 그리고 죄와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준동하는 악에 대하여서는,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고유한 다스림 가운데에서 죄와 악의 문제마저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협력하는 도구가 될 뿐이라는 신뢰를 가진 사람이다. 궁극에는 하나님의 선한 다스림이 온전히 세상에 드러나서 죄와 악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때가 온다고 믿는데, 그 때를 가리켜 종말이라 부른다.

 

문 씨 발언으로 다시 돌아오자. 조선에 대한 일제의 강점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많은 백성들을 학살하고, 고문했으며, 여성을 유린했던 그들의 만행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고유한 방식으로 다스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의 뜻일 리가 만무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러한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며, 일제의 압제 아래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시다. 일제의 강점을 하나님의 뜻으로 치부하는 생각은 성육신(成肉身)하신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4. 십자가와 하나님의 다스림

우리는 성육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다스림을 경험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적·종교적 집단에 의하여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인류의 죄와 악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라 할 십자가 사건을 주동한 당시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에게로 돌릴 수 있는가? 그들은 그들의 이권과 탐욕 그리고 기득권을 위하여, 그들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사형대로 몰아넣었다. 이대로 악인의 승리로 끝나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악을 용인하거나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부활이라는 생명의 방식으로 오히려 악을 꺾으시고 죄를 없애신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방식으로 — 이를 테면,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시는 등의 방식으로 — 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 즉 새로운 생명[復活]을 통하여 정의의 손을 올리신다. 성육하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인류의 가장 악한 자리에서도 생명의 차원에서 그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신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다스림은 악한 행동을 일으켜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의 죄와 악이 감히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악한 행동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조장하여서 선한 일들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그 불의마저도 하나님의 고유한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삼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 즉 다스림은 어둠을 비추는 빛과 같다. 새로운 생명의 빛이 환하게 비추는 때가 오면 빛의 결여인 어둠은 사라진다. 새로운 생명의 빛은 죄의 권능과 죽음의 승리를 없앤다(고전 15:35~58 참고).

 

5. 눈물 닦아 주시는 하나님

따라서 우리는 죄와 악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지언정, 죄와 악에서 비롯된 고통과 고난을 조장하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손은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과 함께 했던 것이 아니라 그 만행과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던 자들과 함께 하셨을 터이다.

바울 사도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말한다. 우리가 부활의 생명이라는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는 것도, 그래서 고통과 고난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구체적인 방식과 그 이유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성경의 증언과 부활 사건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다. 그리고 감추어진 — 그래서 다 알지 못하는 — 하나님의 통치(Deus absconditus)가 온전히 드러날 때를 간절히 기다린다.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계 21:3~4, 개정공동)

 

그 날이 속히 오기를…….


profile

정용섭

2014.07.28 09:59:00
*.94.91.64

평신도(?) 청년이

무게감 있는 신학 소논문을 썼군요.

잘 읽었습니다.

그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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