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부른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영국 출신 어느 유명 산악인이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우문현답을, 또는 선문답을 했다고 한다. 언어가 말을 거는 경험을 하는 시인들처럼 산악인들은 산이 부르는 경험을 한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생명을 담보해야만 하는 행위를 반복해서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그걸 맛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행동까지 하게 만든다.
마약처럼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제압하는 그 산행의 맛은 표현하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일단 절대 희열이라고 봐도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산 이외의 그 어떤 대상을 통해서도 주어지지 않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배타적이고 독보적인 경험이다. 만약 그것과 비슷한 것을 다른 데서도 맛볼 수 있다면 그는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목사들은 산의 부름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산악인들처럼 하나님을 절대적인 희열로 경험하고 있을까?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거나 종교적 교양의 차원으로만 아는 목사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것으로는 절대 희열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영혼의 중심이 계속해서 흔들린다. 쉬운 말로 끊임없이 한눈을 판다. 목회 성공에 매달리고 교회 정치에 휩쓸린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영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하니까 밖으로부터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한국교회 목사들이 공연한 일로, 또는 별로 본질적이지 않은 일로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하나님을 절대 희열로 경험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게 겉으로 표시 나는 건 아니다. 얼굴이 유달리 붉게 빛난다거나 목소리가 매력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다. 인간적인 실수를 전혀 행하지도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능력이 갑자기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기도 했고, 실수도 했다. 하나님을 절대 희열로, 즉 생명의 충만감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상황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영적 다이내믹을 가리킨다.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하루, 이틀, 더 나가서 일주일이나 한 달, 또는 일 년이나 그 이상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이것은 곧 하나님만으로 삶을 견뎌낼 수 있는가에 대한 검증이다.
벌써 3일째 이 글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단에 하나님을 절대 희열로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주관적인 감상이나 감정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검증을 할 수 있는지
그 시금석까지 제시해주셔서 몇 번이고 줄을 치는 마음으로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렴풋하게나마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 경험과
여러가지 생각의 단초들, 그리고 신앙과 삶에 대한 지향점들이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 안도가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큰 기쁨이 되기도 하는 아침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가족'이 떠올랐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이란...
지금의 시대 정신을 거칠게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삶이고, 하나씩 내려놓아야 하는 삶일진대...
비록 아빠는 그 삶이 바른 삶이고, 그곳에 참 만족이 있어 그 삶을 살고자 하지만...
아직 신앙적인 고민이 깊지 않은 아내와 이제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올라갈 아이들에게
아빠의 삶을 강요(?)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오래 하거나,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서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더 힘든 부분인 것 같습니다.
혹시나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저와 같은 40대 가장들이 또 있지 않을까 싶어
월요일 아침...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적어봅니다.
어제는 대구에서의 예배 후
부리나케 서울로 올라가
예배와 신학공부를 인도하고
교우들과 저녁밥을 함께 먹고
저녁 9시 케이티엑스 기차 하고 대구에 와서
동대구역에 주차시켜 놓은 차를 끌고
원당 집에 들어오니 밤 12시가 되었습니다.
재미 있지요? ㅎㅎ
특히 매월 첫 주일은 성찬식이 있어서
예배 진행에 에너지를 좀더 쏟았습니다.
기차 타고 내려오면서 달콤한 잠이 쏟아지긴 했지만
뒷자리에 앉은 가족들로 인해서 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두 세살 쯤 되는 아이를 가진 젊은 부부였습니다.
아이가 계속 밖으로 나가자고 보채고
엄마는 가만히 있고
아빠는 아이보다 더 수선스럽고... ㅎㅎ
요즘 젊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혼내는 법이 거의 없더군요.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하는 게
내가 보기에는 바른 교육인데
무조건 아이들 눈치를 살피기만 하네요. ㅎㅎ
저는 딸만 둘을 키웠는데,
저 아이들이 어렸을 때 기차를 타거나
또는 식당에 가서도
옆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못 봤습니다.
가만히 있거나 내가 작은 소리로 하는 말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인형을 갖고 놀거나 했어요.
독일에서 잠시 머물던 때에 경험한 건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는 시끄럽게 놀지만
기차, 버스, 식당 등에서는 정말 조용합니다.
어른들도 물론 조용하구요.
우리나라에서는 어른들도 기차에서 시끄럽더군요.
스마트폰 벨 소리, 전화 통화하는 소리,
간혹 코 고는 소리, 음
기차 타고 서울 가는 것 자체는 괜찮은데,
이런저런 소음을 견뎌내야 한다는 게 힘들지요.
그런 소음마저 음악처럼 들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푸념이었습니다.
가족 이야기를 하셨네요.
당연히 강요는 안 되는 거지요.
각자 자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한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가족이 특별한 관계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족도 남이니,
모두가 소울메이트가 될 수는 없겠지요.
가족이 오를 수 있는 높이에서만 함께 놀고,
더 높은 곳은 결국 혼자 올라가야 합니다.
높이 올라가지 못한다고 해서 가족을 탓할 거도 없고,
또 억지로 끌고 올라갈 수도 없는 거지요.
아마 또다른세계 님은 문제를 잘 풀어가실 겁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지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멀리 버려질 수도 있겠네요...
한국 교회 목사님들이 진리만을 갈망하길...
그래서 저 같은 평신도들의 영적인 길잡이가 되어 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