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시편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이 23편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약 목사 고시의 설교학이나 조직신학 논술시험 담당자라고 한다면 이렇게 문제를 낼 것이다. “시편 23편 기자의 하나님 경험을 A4 5장 안에서 약술하라.” 앉은 자리에서 쓰되, 시간은 5시간이다. A4 다섯 장이면 2백자 원고지 50장 가까운 분량으로 주일공동예배의 설교 한편에 해당된다. 목사 고시를 준비하거나 이미 통과한 젊은 목사들이 이런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이게 가능하지 않으면 설교자로 나설 생각은 접는 게 좋다. 그런 사람은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돌보고 교회 행정을 처리하는 목회자로 살면 된다. 그런 역할도 설교자의 역할 못지않게 중요하다.
내가 목사 고시를 쳐야 할 후보생의 입장에서 시 23편 1절만 설명해보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일단 이 시인이 여호와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게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가 입에 올리고 있는 여호와는 도대체 누군가? 이스라엘 전통이 말하는 그 하나님인가? 시인은 이스라엘 영성의 역사에 서 있으니 당연히 그런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해되고 진술된, 그리고 묘사된 하나님 표상이 한 가지만이 아니고, 서로 일치하는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여러 표상들이 충돌하면서 하나님 신앙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이런 것들은 신학 전문가들의 몫이니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시인이 여호와를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짚어야 한다.
시인은 여호와를 목자라고 노래한다. 비유다. 이것은 유목민인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생한 비유다. 양은 목자와의 관계에서만 참된 안식을 경험한다. 양은 직접적으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목자와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만 한다면 그 모든 염려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노래한다. 이건 역설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제로 부족하게 살았다. 그들만이 아니라 고대인들은 누구나 그랬다.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은 삶의 많은 시간을 돈 버는 데 사용하다. 그래도 늘 뭔가 늘 부족하다. 여호와가 목자이기에 부족한 게 없다는 시인의 진술은 먹고 사는 문제가 실제로 넉넉해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종의 도사처럼 그런 부족한 상황을 가소롭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포착해야만 우리는 시인의 영성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인류 역사에서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뭔가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소유가 늘어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느낌이 더 강해진다. 그 이유는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데에 있다. 영적인 존재가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려면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가 필요하다. 조직신학 공부가 충분하지 못한 사람은 이것에 대해서 충분하게 이해하지도 못하고 설명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6절까지 풀어가기 시작하면 A4 다섯 장을 채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편 기자의 영혼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게 시인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