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대해
여기서 시인의 영혼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일단 이렇게 대답하겠다.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현실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근원적으로 견인해낼 수 있는 인간의 구성 요소다. 이게 영혼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아니다. 아마 다른 사람은 다르게 대답할 것이며, 나 자신도 또 다른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혼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다른 이들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본질이라거나, 하나님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 현상, 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 생명의 궁극적인 토대라고 표현해도 된다. 이런 표현들이 어렴풋이만 이해가 되지 실질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걸 넘어서는 게 신학공부이며, 영성 훈련이다.
영혼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보라. 한 사람이 인식하고 경험한 영혼의 깊이가 다르다는 게 그 대답이다. 앞에서 비유로 들은 산 이야기를 다시 보자.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베이스캠프에만 올라갔던 사람과 정상에 오른 사람의 에베레스트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똑같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산 이해에 따라서 에베레스트는 다르게 경험된다. 이건 인간의 모든 경험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테니스나 바둑도 마찬가지다. 아마추어 5급 실력이 있는 바둑 동호인과 프로 9단의 전문 기사에게 바둑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경험된다. 똑같이 프로 9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바둑에 대한 이해와 경험에 따라서 바둑은 다르게 경험된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달리 컴퓨터나 동물의 세계 경험은 늘 기계적이다. 침팬지에게 자전거 타는 기술을 가르쳤다고 하자. 그 침팬지는 그 기술을 단순히 반복할 뿐이다. 아무리 많은 걸 가르쳐도 배운 것 이상의 차원에, 즉 자전거타기의 미학에 이를 수 없다. 그들에게 영혼이 없다는 증거다. 물론 동물들에게 영혼이 없다는 사실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들도 세상의 깊이와 신비를 경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경험들을 인간처럼 문화, 예술, 언어 등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 영혼이 없다는 것만은, 더 정확히 말해 인간에게 나타나는 그런 영혼 현상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