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것’의 탐색
설교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것 시 관련 도서 중의 하나는 안도현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한겨레출판)다. 2008년 5월-11월에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26편의 글이 실렸다.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에 미혹되어 살아온 지 30년이다. 여전히 시는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도저히 알지 못할 허공의 깊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무엇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으므로 다만 ‘시적인 것’을 탐색하는 것으로 소임의 일부를 다하고자 한다. ‘시적인 것’의 탐색이야말로 시로 들어가는 가장 이상적인 접근 방식이라 믿는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담론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시의 성채를 위해 ‘시적인 것’을 반죽하거나 구부러뜨릴 수도 있다. 이 책은 내 누추한 시 창작 강의노트 속의 ‘시적인 것’을 추려 정리한 것이다.
위 글에서 시를 신(神)으로 바꿔서 읽어보라. 그대로 통용될 것이다. 신은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도저히 알지 못할 허공의 깊이다. 그래도 우리는 신을 무엇이라 말할 자신이 없기에 ‘신적인 것’을 탐색할 뿐이다. 설교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을, 또는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는 실증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전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을 직접 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안내할 뿐이다.
이런 설명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에 명백하게 자신을 드러냈기 때문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하나님을 정확하게 전해야 한다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활동했던 뛰어난 설교자들과 현재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설교자들은 모두 확신에 차서 하나님을 전했다. 설교의 목적이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식하게 하거나 또는 의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즉 막막한 심정을 놓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자기의 인식과 경험 안에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다는 이 근원적인 사태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벗어나는 순간에 그는 떠돌이 약장사가 되고 말 것이다.
시는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도저히 알지 못할 허공의 깊이라는 안도현의 말을 오해하면 곤란하다. 시를 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시를 모른다는 말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학교에서 시작법을 가르칠 수 없었을 것이다. 저 말은 시, 또는 언어의 존재 신비를 가리킨다. 시인이 억지로 시를 쓰기 원한다고 해서 시를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시는 사람이 마음대로 생산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시 스스로 시인을 찾아오는 언어와 사유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시인은 시가 왔을 때에만 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그 이전에는 시적인 것을 대략 말할 뿐이다. 설교자의 하나님 경험과 증언도 시인의 그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