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과 강신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기독교를 비판하는 한국 철학자들에 대해서 한번 짚어야겠다. 목사들이 철학을 잘 모르면서 무조건 배척하듯이 철학자들 중에서도 신학을 잘 모르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수유너머’라는 철학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고미숙이라는 여성 철학자가 어느 공개 강연에서 자신은 기독교의 초월적 인격신을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 사람의 철학자 강신주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자신이 기독교의 논리를 제압할 수 있는 책을 쓰겠다고 공언했는데, 두고 볼 일이다.
이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예수 믿고 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살다가 죽어서 천당에나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집단적 히스테리 현상쯤으로 보일 것이다. 특히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믿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자신들이 공부하고 경험한 세상은 초월적 인격신의 개입이 불가능하다. 세상이 자체의 내재적 작동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다만 기독교의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지금 나타나는 교회 현상에 국한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만 짚겠다.
우선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라고 할 때의 그 인격은 반드시 인간의 한 속성인 그 인격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고대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현대철학에 이르기 까지 철학이 밝혀보려 했던 그 근원의 총체가 곧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인격 개념이라도 봐야 한다. 하나님의 인격은 장자가 말하는 도나 자연일 수 있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일 수 있고,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일 수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철학이 세상의 궁극적인 것을 여전히 다 밝혀내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모른다. 다만 인격신이라고 할 때 중요한 것은 관계다. 그 하나님은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고미숙이나 강신주 등이 비판하는 인격신 개념에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신기한 방식으로 뭔가를 얻어내려 한다는 비판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건 오해다. 그런 기도 행위를 연상시키는 이야기들이 성서에 나오지만 그건 성서에서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인격신에 대한 비판이 대상으로 삼는 또 하나의 다른 그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걸고 있는 성서의 많은 이야기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하듯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을 한다는 사실이 그런 분들의 눈에 유치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것도 성서에 대한 오해다. 그런 표현들은 모두 메타포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말하는 이가 아니다. 그러나 말을 거신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성서기자들은 경험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인격신이니 뭐니 해서 시비를 걸려면 시인들의 모든 시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다고 해서 자연과학과 철학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비판을 통해서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지는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게 아니겠는가. 본인들은 거부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표면적으로 말하는것은 천국이라는 개념이 현세의 삶을 내세의 삶의 도구로 만드는 나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자본주의 비판은 오늘, 지금을 희생해서 마치 미래의 장미빛을 주려는 환상을 심어준다는거죠 궁극적으로 같은거리고 하더라고요.
마르크스가 꿈꿨던 공산주의는(세계적인 현상으로서의 공산주의 말고요)를 파리꼬뮨에서온 꼬뮨주의라고 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였다고 합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 제한하는 모든 체제, 국가 자본주의등을 모두 저런 관점에서 비판합니다 스피노자, 장자, 니체, 마르크스 전부 저렇게 해석하더라고요. 기독교는 단지 저중에 하나일 뿐이고요.
이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기독교에 대한 생각인데 목사님이 지적하신 부분이라 약간 다른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틀린부분이 있다면 가르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