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뭐꼬?
리얼리티 개념이 갑자기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바둑 아마추어 5급 실력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프로 9단이 놓는 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공부에는 비약이 없다. 천재가 아니라면 모두가 한 단계 씩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리얼리티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가 신학에서는 철학이며, 인문학이다. 더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다.
세계에 대한 통찰력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세계를 통찰하지 않고 그냥 산다. 그냥 돈벌이 하고, 친구 만나고, 수다 떨고, 사랑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리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세상이 궁금하지도 않다. 비가 왜 오는지, 바람이 왜 부는지, 구름이 왜 저렇게 변화무쌍한지 무덤덤하다. 먹이를 얻어먹으려고 우리 집을 매일 찾아오는 길고양이들은 꽃과 나무를 구별하지 못한다. 구름도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없다.
선승들은 ‘이 뭐꼬?’라는 화두를 붙든다. 그들은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서 이 뭐꼬 하고 질문한다. 파리가 한 마리 날아다닌다고 하자. 이 뭐꼬? 파리는 왜 이 시간에 거기서 날아다니는 걸까? 그 파리는 어디서 왔을까? 그 파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이 우리 할아버지의 세포와 어떤 관계를 맺는 걸까?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은 어디서 왔나? 베를린 중심에 있는 티어가르텐 공원에서 불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신비롭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학문적인 배경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으며, 더 나가서 리얼리티 개념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다.
오늘 목사들은 교회 업무에 너무 빠져 있어서 세상의 근본에 대한 통찰력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이는 곧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교회 지도자는 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교회를 부흥시킬 수도 있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도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쏠려 있다. 교회를 다님으로써 그것을 충족 받으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거칠게 말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그렇다. 이런 교회 풍토에서는 목사가 하나님에 대해서 변죽만 울려도 그것 자체로는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변죽만이요? ㅎㅎ 그럴 때도 이 뭐꼬? 말하면 되는건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