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단 한 번도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단순히 살지 않았다.
언제나 보다 새로운 삶, 보다 완전한 삶을 꿈꾸며 끝없이 도전해왔다.
불의와 고난으로 가득한 현실의 벽 앞에서 때로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금 궁극적인 행복과 완전한 평화를 상상하면서 눈앞의 절망을 해쳐왔다.
인간의 역사가 정체하지 않고 쉼 없이 변화할 수 있었던 것도
오늘보다 나은 내가 되고, 오늘보다 나은 삶을 살고,
오늘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뜨거운 갈망과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갈망과 에너지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그 진원지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 진원지가 경쟁심이라고 하기에도, 모방 욕망이라고 하기에도,
상상력이라고 하기에도, 창의성이라고 하기에도, 영(靈)이라고 하기에도 뭔가가 부족하다.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실체조차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갈망과 에너지의 진원지 또한 영원히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갈망과 에너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정의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나는 이 갈망과 에너지의 정체를 ‘구원 욕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대부분 ‘구원’ 하면 대뜸 종교를 떠올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꿈꾸는 낭만적 환상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구원 욕망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다.
인간의 절대 한계와 삶의 궁극적 한계를 정직하게 인식한데서 비롯된 가장 현실적인 욕망이고,
모든 욕망의 저 밑바닥에서 꿈틀대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다.
물론 지나친 구원 욕망은 하나님의 구원을 뒤틀고 왜곡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욕망이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 현대인을 보면 이 구원 욕망을 정직하게 지각하고 갈망하는 것 같지 않다. 실제적으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구원 욕망에서 비롯되고 구원 욕망과 연결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눈앞의 현실과 필요만을 좇아 사느라
욕망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구원 욕망은 외면한 채 사는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라.
구원은 유치한 종교적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하는 자들,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다 가면 그만이지 뭘 더 고민하느냐고 힐난하는 자들,
한 번 왔다 가는 것은 생명의 자연 현상이라며 죽음에 기꺼이 순응하는 자들,
‘삶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말했던 공자처럼
살아가는 일조차도 알지 못해 헉헉거리는 주제에 죽음 이후의 일까지 끌어안고 시름해야 할 이유가 뭐 있겠느냐며 짐짓 ‘인식 불가’를 선언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 자들이 아마 한 둘은 있을 것이다.
사실이다. 요즘은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워낙 강세이다 보니
‘구원’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보다는
당장 먹고 사는 일부터 해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역사의 진보를 구원이라고 생각하며
과학과 기술이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그렇다. 인간은 유사 이래 신(神)에게, 혹은 절대자나 절대 권력자에게 구원을 갈망해왔으나
현대인은 더 이상 ‘구원’ 같은 문제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불의하고 부실한 세계의 현실, 절대 한계에 갇힌 삶의 현실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아 문을 두드리려 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회적 욕망에만 눈을 주고 질주할 뿐.
불의하고 부실한 현실 속에도 내가 빼먹어야 할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빼먹는 일에만 동분서주할 뿐.
사실은 구원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근원 욕망이고,
구원 문제야말로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인데도 현대인은 거기까지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매우 냉철하게 정치적 욕망 ‧ 경제적 욕망 ‧ 성공 욕망 등 사회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 머물고,
재미 ‧ 여가 ‧ 게임 ‧ 화려함 ‧ 안락함 ‧ 사치 ‧ 가정의 행복 등 사적 욕망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정치 · 교육 · 예술 · 전쟁 · 의술 · 스포츠 · 섹스 · 놀이 · 마약 · 과학 · 기술 · 경제 등에서
혁혁한 업적을 성취한 자들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욕망이지 구원 욕망이 아니다.
구원 욕망은 사회적 욕망을 성취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며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묻자. 왜일까? 왜 현대인은 구원 욕망보다는 사회적 욕망과 사적 욕망에 몰입할까?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우리 사회가 경제적 가치 일변도이기 때문이다.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이고, 돈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최고의 힘인 현실에서
구원은 돈과 직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우리 시대가 현란한 영상 시대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거의 아름답고 현란한 영상에 눈과 귀와 마음을 빼앗긴 채 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만 욕망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욕망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정말이다. 우리가 경제적 가치 일변도의 사회, 현란한 영상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구원 욕망은 외면한 채 사회적 욕망과 사적 욕망에 갇혀 사는 것이다.
근원 욕망인 구원 욕망에도 미치지 못하는 피상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경제적 부에 감각이 무뎌져서.
또 한 쪽에서는 상대적 가난에 마음을 빼앗겨서.
아무튼 이래저래 우리는 구원 욕망을 지각하지 못함으로써 구원 욕망을 초월한,
구원 욕망에 미치지 못함으로써 구원 욕망을 초월한 미증유의 시대를 살고 있다.
[말씀샘교회 담임 목사]
정병선 목사님,
인사드립니다.
제가 참 오랜만에 인사 드리는 거지요?^^
목사님께서 자주 안 오시니까 인사도 이렇게..^^
엊그제 말씀샘교회에 놀러갔었어요.
앗! 깜짝..놀라셨죠?(홈페이지여요.^^)
깜짝 놀랐어요. 올해가 창립3주년인데
와! 어쩌면..예배당이 꽉 찼어요.
역시.. 정병선 목사님이시구나!! 했습니다.
목사님의 진실, 사랑, 특히 복음에 대한 진정성이
진가를 발휘하는구나 싶었어요.
여러방을 구경했습니다.
설교말씀은 물론이려니와 갤러리 사진 한장한장에도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사랑'은 흠뻑 배어 있었습니다.
위 말씀을 읽으면서도 동일한 생각에 잠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진짜 제가 구원의 욕망-구원의 열정이 있는 사람인가 하고요.
(목사님, 구원의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 삶의 매 순간이 모두 다 두렵고 떨림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드러나는 현장이라고 할까요?
가을은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기에 최적기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항상 건강 유의하시고 주님 안에서 늘 평안하세요.
라라님,
제가 여기에 자주 출현하지 않아서 만남도 뜸하네요.
저도 반가워요. 그동안 건강하셨지요??
말씀샘교회 인터넷 세상에 들어오셨다구요.
아직 작은 옹달샘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크답니다.
모두 행복하게 즐거워하며
작은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의 구원을 쬐끔씩 맛보고 있어서 감사하지요.
물론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가운데서 경험하는 기쁨이 더 귀하기에
최상의 감사로 향유하고 있답니다.
라라님 표현이 맘에 듭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드러나는 현장이라고 할까요?"
예, 바로 그걸 꿈꾸며 기도한답니다.
제 마음을 정확하게 읽으셨습니다.
멋진 이 가을.
라라님의 가슴 속에도 가을이 익어가겠지요....
반가웠습니다. ^^
목사님 늘 부끄럽습니다.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사는 생활, 자책해봅니다.
"왜 현대인은 구원 욕망보다는 사회적 욕망과 사적 욕망에 몰입할까?"
저는 2 원인 외에도 있는 듯합니다. 구원은 손으로 눈으로 감각으로 잘 잡히지 않지만, 사회적, 사적 욕망을
손에 잡히는 경제가 있듯이 오감으로 직접 체험하고 만족할 수 있는 요인이 있는 듯합니다. 목사님 지적하신 2번째 범주에 들어 갈 수 있겠죠. 그리고 그런 사회적, 사적 욕망을 자극해야 부자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메카니즘을 재생산하는 숨은 실세들이 있죠.
그런데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구원이라는 화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목사님 글을 오랫만에 접했습니다. 다시한번 인간존재를 되돌아 보는 기회를 제공받았습니다. 건강하세요. 꾸벅
와우~~ 더럼님, 반갑습니다.
평안하셨지요??
자본주의의 이면을 정확하게 읽으시기에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를 잘 지적하셨다고 생각됩니다.
현대인의 마음을 훔치고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인간의 근원 욕망조차도 외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 때 교회는 구원 욕망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삶을 외면하게 했는데,
지금 세상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빼앗아
존재와 삶을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교회가 알짜배기 삶터가 될 때
시대의 길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오랜 만에 만남 반가웠습니다.
멋진 가을....평안하세요...^^
정병선 목사님
오랜만에 글읽기와 댓글쓰기 합니다.
구원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린 시대 또는 세대에 대한 두번째 이유 읽다가 최근에 접한 시가 생각나서..
다 옮기자면 조금 길어서 조금만 인용합니다.
"광화문 네거리엔 전광판이 많다/ 손택수
.............
잠시도 무료할 틈이 없는 거리
저물어가는 노을 대신 화려하게
명멸하는 이미지들을 따라가기 바쁘다
언젠간 밤하늘 별을 보면서도
뉴스나 광고를 생각하겠구나
광고 하나 나 하나
광고 둘 나 둘
리모컨으로 꾸욱 눌러 꺼버릴 수도 없는 전광판을 헤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겠구나
............."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감사합니다.
예, 목사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평안하시지요?
지금 거처하시는 언덕 위 집이
요즘 계절과 맞물려 아주 멋질 것 같습니다.
그곳에 제가 하룻밤 신세를 진지가
벌써 상당한 세월이 흘렀군요.
건강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