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5)
원당으로 이사 온 뒤에 테니스장 접근이 어려워졌다. 하양에서 살 때는 자전거로 5분이면 해결이 되었는데, 지금은 차로 15분을 잡아야 한다. 하양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을 나갔는데, 지금은 두 번 나간다. 차라리 잘 됐다. 시간도 절약될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 체력적으로도 세 번은 무리가 올 테니 말이다. 테니스장 환경은 물론 지금이 훨씬 좋다.
책 읽기와 글쓰기, 예배와 설교와 강의가 내게 기도라고 한다면 테니스는 일종의 노동이다. 테니스 외에도 설거지와 청소와 텃밭 가꾸기도 몸으로 하는 거지만 테니스만큼 몸을 많이 쓰는 거는 아니다. 한번 나가서 두세 시간 동안 몸의 모든 에너지가 고갈 될 정도로 몸을 쓴다. 수도승들에게 기도와 노동이 하나이듯이 나에게 목사로서의 활동과 테니스 운동은 하나다.
테니스는 아무리 몸을 쓰는 거라고 하더라도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노동과는 질이 다르지 않느냐, 하는 반문이 가능하다.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은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지만 테니스는 자기가 원해서 하는 거라고, 그러니 테니스를 노동이라고 말하는 거는 안일한 발상이라고 말이다. 물론 건축 공사 현장에서 하는 노동과 테니스장에서 하는 운동은 직접 비교될 수 없다. 그러나 양쪽 모두 인간의 몸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노동의 본질은 놀이로 승화되어야 한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여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을 짓는다고 해보자. 그들은 각각의 역할을 통해서 집짓기의 창조적인 사건에 참여할 수 있다. 몸을 통해서 창조적인 것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놀이다. 그런데 놀이로서의 노동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유는 노동이 금전적 가치로만 평가된다는 데에 있다. 이것만 극복된다면 모든 노동은 놀이가 될 수 있다. 어쨌든지 나는 테니스를 함으로써 수도승에게 기도와 더불어 필수적으로 중요한 노동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문단 둘째 줄에 오타입니다.
두 세 시간 -> 두세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