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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 공부 제7강, 2014년 11월6일, 저녁 7:00-8:30
고난에 대해 본문: 딤후 1장(1-18)
1. 딤후 1장 구조
1) 인사(1,2)/ 2) 디모데의 외가(3-7)/ 3) 복음과 고난(8-14)/ 4) 인물 평(15-18)
2. 바울의 고난
1) 육체적인 지병/ 2) 선교 과정에서의 박해/ 3) 예루살렘 유대기독교와의 갈등-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3. 욥 이야기
1)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은 저주 상태로 떨어진다.
2) 친구들이 욥을 충고한다. 죄를 회개하고 다시 복을 받아라. 당시 지혜문서 전통이다.
3) 욥은 고난과 죄의 관련성을 부정한다.
4) 결론: 고난, 악의 문제는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다.
4. 예수의 십자가 이야기
1) 고전 1:23- 십자가의 죽음은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 이방인에게 미련한 것이다.
2) 예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토로했다. 고독, 의심, 시험을 감당함.
3)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경험했다. 인간의 죄가 폭로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활을 통해서 그 죄가 극복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theologia crucis, theologia gloriae
5. 신정론(神正論) 문제
1) 하나님이 사랑이며 동시에 전능한 분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악과 고난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세월호로 인한 참척의 고통은 누구의 책임인가?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2) 전통적 대답- 첫째, 인간을 더 성숙한 상태로 이끌기 위해서 내리는 시험이라는 주장. 둘째, 타락한 천사가 악을 행한다는 주장. 이것은 충분하지 못한 대답이다.
3) 신학적인 대답 시도- 첫째,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만이 그 대답을 줄 수 있다는 입장. 둘째, 십자가 신학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그 고난의 현장에 현재한다는 입장. 셋째, 부활신학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무의미성에서 새로운 시작을 행하실 수 있다는 입장. 넷째, 종말론적 관점에서 종말의 빛에서 오늘의 모든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입장. 다섯째, 윤리적 관점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고난과 악에 저항해야 한다는 입장.
4) 하인리히 오트 <신학해제>- “신정론 질문은 나와 남이 겪는 고난의 근원과 근거를 묻고, 나와 남이 당하는 악의 근원과 근거를 묻는다. ... 이 질문은 도리어 신학적인 한계질문이다. ... 신정론 질문은 신학 안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다.”
5)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한편으로는 세상의 고통을 인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아주 다른 근거에서 하나님의 선함을 확신하는 우리가 어떻게 그 선과 고통을 모순되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
6) K. 바르트 <복음주의 신학입문>- 하나님의 No는 Yes의 껍데기다. 이 껍데기는 파멸되고 하나님의 Yes가 터져 나올 것이다. 이런 희망에서 고난과 악을 ‘참고 견딜 수’ 있다.
십자가가 죄성의 폭로라는 대목을 인상 깊게 들었다니,
그게 오히려 나에게 인상 깊군요.
그런 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스쳐지나갑니다.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지요.
또다른님이 조금만 일찍 본격적인 신학책을 읽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빨리 그 세계 안으로 들어왔겠지만
지금 이런 정도로 진도만 하더라도 대단한 겁니다.
정확한 비교인지 모르겠지만
무림세계의 정파와 사파처럼
신학에도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정파 신학이 진도가 느리지만 일정 수준에 오르면
사파 신학이 따라올 수 없지요. ㅎㅎ
감사합니다 목사님~
지금이라도 정파 신학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게 감사하죠~ㅎㅎ
일단 올 겨울은 하이데거를 위시한 존재의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으니 여기에 올인해보려구요~
그런데... 역시나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존재와 시간 강독'에 들어가기 전에
하이데거를 간략히 소개한 책을 읽고 있는데
결국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는 형이상학과
서양철학사, 실존주의와 하이데거의 스승인 후설의
현상학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이데거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구나...싶더라구요...음...음...
그래도 쉬지 않고 천천히 가보려구요~^^
고난과 관련한 문제는 청년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가 가장 힘들게 붙들고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비아를 알고 여러 신학책과 철학책들을 읽기 전까지
가장 많이 읽었던 책들 중에 하나가 C. S. 루이스의 책들입니다.
순전한 기독교나 스크루페이프의 편지, 영광의 무게, 피고석의 하나님 등...
그래서 당연히 고통의 문제도 읽었지만...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한 발 물러서 있으라...'
이것이 제가 얻은 나름의 답변이고, 지금은 좀 더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지만
잔혹한 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볼 때마다 가슴을 후비는 질문들이 툭툭 던져집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냐고...
그런데 사실 오늘 강의에서 제가 좀 충격(?)을 받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왜 인류 구원의 길인가?' 하는 목사님의 질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폭로다' 라고 답변해주셨고
죄성이 드러나야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구원의 빛을 향해 나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부끄럽기도 하고, 또 충격을 받은 것은
지금껏 이와같은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과
제 스스로도 기존의 매뉴얼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런 방식으로
한 번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틀째 멍~때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적지 않게 했는데...도대체가 아는 게 없네요... 고민없이 사나 봅니다.
기초체력의 부실을 여지없지 보여주는 대목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요? 하이데거와 오트의 책도 사놨는데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