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http://school.ohmynews.com/NWS_Web/View/...0001465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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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답사 출발에 앞서 안중근 의사의 여정을 벗어나지 않고 가능한 그대로 뒤쫓는 방향으로 취재 범위를 정했다. 그리하여 속초항을 출발하여 연추에서 본격 답사를 시작해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 창춘, 다롄을 경유하여 뤼순에서 마치기로 했다. 답사를 기획할 때 중국 여러 곳과 연해주 일대에 안중근 가족이 살았던 곳이 있고 아직도 친척 후손이 살고 있다는 제보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찾지 않았다. 답사 비용과 시간 문제도 있었지만, 자칫 초점이 흐려질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코자 서울 장충단에 세운 박문사. 1932. 10. 26. 낙성. | |
ⓒ 눈빛 <대한국인 안중근> |
답사 중인 2009년 10월 31일 저녁, 하얼빈에서 그날 취재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뒤 하얼빈역 부근을 산책하는데, 역 대합실 2층에 PC방이 있었다. 그동안 열어보지 못한 메일함이 궁금하여 들어갔다.
엿새간 수신된 메일을 다 본 뒤. 마침 안중근 의사 유적지 답사 중이라 검색란에서 '안중근'을 두드리자 10․26의거기념일을 앞뒤로 많은 기사들이 온라인상에 떠 있었다. 그 가운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기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는 1939년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 이토 분키치와 마주 앉아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말한 뒤,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등 통역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자 가슴이 송곳에 찔린 듯한 아픔을 느꼈다.
▲ 안중근 의사의 유족(아내와 두 아들, 안중근 아내 김아려에게 안긴 이가 '준생',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큰아들 '분도'이다. 큰아들은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 |
ⓒ 눈빛 <영웅 안중근> |
귀국한 뒤 답사기 집필 중 한 애독자가 보내준 창원대 사학과 도진순 교수의 잡지 기고글 '영웅 안중근 가문의 이산과 죽음'과 자료로 구한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라는 책을 읽고는 망연자실했다.
▲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표지 | |
ⓒ IWELL |
그 책을 덮자 호남 의병전적지 답사에서 만난 광주 김원국, 김원범 형제 의병장 손자인 김복현씨 얼굴이 떠올랐다.
의병장 후손의 항변
- 가족들의 수난사를 좀 들려주십시오.
"할아버님(김원국)은 1910년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셨고, 아우이신 작은 할아버님(김원범)은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혀를 끊어 23세 나이로 자결하셨습니다. 저는 제 아버님 얼굴도 모르는데 아버님도 왜놈에게 강제 연행되어 군사비행장 노역 중 공사장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의 시신을 산에다 버린 것을 수습하였답니다.
집안의 남자는 모조리 왜놈 총칼에 희생되니 저희 어머니는 큰 도둑질이라도 한 양 일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제가 물어도 함구령을 내리면서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왜정 치하에서 저희 가족들은 독립운동을 한 괴수의 가족들이라 하여 재산도 몰수되고, 우리 식구들은 전남 보성군 바닷가 허허벌판에 강제 이주되어 거기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거기서 살다가 먹고살 길이 없어 다시 광주로 와 살았지요."
- 의병장 후손으로 살아온 얘기 좀 들려주십시오.
▲ 김원국-김원범 형제 의병장 손자 김복현씨 | |
ⓒ 박도 |
"어머니와 저, 그리고 제 동생, 이렇게 세 식구가 거지처럼 살았지요. 한마디로 거지였습니다. 꿀꿀거리는 돼지우리 옆에서도 살았습니다. 솔직히 의병 후손임이 자랑스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려면 자식을 낳지 말라', '씨앗을 뿌려놓지 말라'고 말합니다.
내 자식이 독립운동을 한다면 극구 말리겠습니다. 물론 권유도 하지 않고요. 할아버지 형제는 기록이나 사진 등 유물 한 점 없습니다. 일제 강점하에서 대역죄인 가족으로 살아남기에 급급했으니, 두 분 행적을 지우기에 바빴을 테지요. 어느 집안에서는 남은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자식의 이름을 호적과 족보에서조차 지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동안 내가 사업을 하면서 체득한 것은 '독립운동가 유족이란 걸 꺼내지 않는 게 낫다'는 겁니다. 독립운동가 유족이라고 하면, 될 일도 안 되더군요. 거래처 사람에게 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소개하면, '존경합니다'라고 겉으로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상대하기 껄끄럽다,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하는지 될 일도 안 되더군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면 행동에 제약만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 해방 후 우리나라 정계고, 재계고, 친일파 후손들이 주류 아닙니까?"
- 박도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179~180쪽
"나는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 백범 김구와 큰 자부 안미생(안중근의 조카) | |
ⓒ 백범기념관 |
김복현씨의 많은 말씀 가운데 유독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려면 자식을 낳지 말라"는 말이 공명되기에 늦은 밤임에도 그분에게 손전화를 눌렀다.
- 안중근 의병장 아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 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 데 대해 같은 의병장 후손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이 다 돌을 던져도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때 남은 가족들이 살기 위해 그렇게밖에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그들(일제)의 회유와 공작이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얼마나 집요했겠습니까?
해방 후 가족들이 살아오면서 얼마나 양심의 가책과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이제라도 그들(안중근 후손)을 포근히 감싸줘야 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려면 자식을 낳지 말라', '씨앗을 뿌려서는 안 된다'고 한 제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http://cafe.naver.com/wonderfulenglishcamp/503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이용성
[장면 1] 1909년10월26일 오전 9시 무렵, 당시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의 직책을 맡고 있던 안중근 장군은 하얼빈역을 방문 중이던 일본국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데 성공한다. 사건 직후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꼬레아 우라”를 세 번 외치고 달려드는 러시아 헌병대에 지니고 있던 권총을 넘겨주고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체포된다. 그 권총에는 총알이 아직 한 발 남은 채였다. 이 사건은 그 시기 동북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었다.
체포된 후, 재판과정에서 보여준 안중근의 소신에 찬 의연함과 동양평화를 넘어 세계평화를 논리 정연하게 주장하는 치밀함에 일본 검사와 판사는 곤혹스러워했고, 언론에서는 연일 그의 투쟁과정을 대서특필하였다. 한 마디로 그는 시대의 영웅이었다. 결국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자서전을 탈고하고, 집필 중이던 동양평화론을 미완성 본으로 남긴 채 거사 5개월만인 1910년 3월 26일 31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되어 장렬히 산화했다.
[장면 2] 1939년10월16일,하얼빈 거사 30주년 기념일 10일 전, 현재 장춘당 공원 내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위치하고 있던 박문사에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과한다. 박문사는 지금은 헐리고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지만 1932년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공적을 기념해 지은 절이었다. 그곳에서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미나미 총독의 뒤를 이어 등장한 이토 히로쿠니가 내민 오른 손을 안준생이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두 손으로 잡는다. 조선은 절망하고 일제는 환호한다.
그 후 안준생은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이 되어 이토 히로쿠니와 함께 전 일본을 순회하며 “눈물의 화해”를 재현했다. 그 보상으로 안준생의 삶은 한결 수월해졌다. 더 이상 일본 순사를 피해 다닐 필요도 없었으며,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일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상해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편안하게 살았다. 안준생은 변절 후 뭇사람들에게 호부견자(虎父犬子), 즉 호랑이 아버지에 개 자식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살았다.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안준생이 거주하던 현지의 중국 경찰에게 그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부당하기도 했다.
이 책은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한국의 역사에 “불멸”이란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안중근 장군에 대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다가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에 상상력을 더하는 소설형식으로 씌어졌다. 제목인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과는 반대다. 저자들이 하고픈 말의 핵심이 제목에 역설적으로 녹아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큰 나무 아래서는 작은 나무가 자랄 수 없다고 했던가? 영웅으로 살다 간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평생 생활고에 찌들다가 결국 변절자의 길로 들어서고 만 한 인간의 고뇌가 책 속에 묻어난다. 안준생은 안중근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장남인 안분도가 7살 때 누군가가 준 독이 든 과자를 먹고 객사하는 바람에 장남의 멍에를 쓰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면서 아버지 없는 세상을 버텨야 했다. 영웅의 아들은 일제 치하에서 매일 일본 순사의 감시를 받으며 일자리를 잡을 때마다 그 순사의 방해로 쫓겨나기를 반복하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미나미 총독의 간계에 빠져 민족을 배반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하지만 변절 후 안준생은 상해를 거쳐 해방 후 미국으로 건너와 그의 후손들은 현재 미국에서 의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인생을 보고 있노라면 한 때의 친일파에서 시류를 잘 타면서 반공주의자로 교묘하게 탈을 바꾸어 쓰고 근, 현대사를 타고 넘는 한국 보수의 수완을 보는 듯 하다. 물론 한국 보수의 절대 다수는 역사적인 영웅 아버지를 두지도 못했으니 안준생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이 책을 쓴 저자 중의 한 사람인 조동성은 전 서울대 교수로서 경영전략과 경영정보시스템 분야에선 상당히 이름이 있는 원로학자이다.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 겸 안중근 장군 기념관 관장직을 맡고 있는데, 그는 안중근 장군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 집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이 뤼순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깨끗하게 죽음을 받아 들이라고 한 영웅의 어머니다운 분이셨다.
저자들은 책에서 드러내 놓고 안준생을 대변하진 않지만 독자들에게 그럴 수 밖에 없었을 정황을 은연 중에 풍긴다. 민족을 배신한 변절자를 직접적으로 옹호할 순 없지만 그래도 영웅 아버지의 큰 그늘에 가려 죽음보다 못한 생활을 강요당했던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민족의 영웅으로 삶을 살다 갔지만 남은 가족들에게 피나는 고난을 떠 맡긴 안중근의 삶과 평생 호부견자 소리를 들으며 살았지만 가족들을 편안하게 지키며 살다간 안준생의 삶이 묘하게 대비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올바른 삶인지 깊게 반추해 보게 한다.
이 책은 크기가 손 안에 쏙 들어 올 정도의 문고판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본문이 74페이지 이고, 부록에 있는 안중근의 ‘하얼빈 대첩’과 동양평화론까지 다 포함해도 100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책이라서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더군다나 IWELL이라는 출판사에서e-book으로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서 누구나 읽어 볼 수 있다. 광복절 즈음에 의미 있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 하여 일독을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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