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11)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그것은 하나님 경험을 가리킨다. 하나님 경험이 우리의 정체성 문제에서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만 ‘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나’가 누군지를 알게 되는 그 순간이, 또는 그 사태가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일상을 통해서는 ‘나’가 누군지를 알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인간관계와 업적만 해도 그렇다. 그 모든 것들은 먼지와 같다. 어느 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초등학교 시절이나 그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그 때의 일들이 오늘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다. 당시 단짝처럼 지냈던 친구들도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설령 그런 죽마고우가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런 일들이 당시에는 아무리 강렬하게 자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세월과 더불어서 다 시들해지고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지난 일들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나 내가 성취하려는 모든 일들도 역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목회 행위도 마찬가지다. 목회 업적이 아무리 커도 그것으로 자기를 확인할 수는 없다. 많은 신자들이 ‘우리 목사님’이라고 따라도 그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실존이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수도자들이 일상을 포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일상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인생이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라고 정의하면 괜찮을까요?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연설에서 그랬듯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이후 본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이라면 내가 할 행동인가라는 물음으로 본인의 삶에서 본질적인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면서 살았다는데 저 자신 스스로도 죽음 앞에 서있는 자신을 직시하고 그러면서 제 삶에 정말 본질적으로 중요한게 무엇인지 그렇지 않은게 무엇인지 구분할 줄 알아야 겠죠? 그리고 27살인 지금 이 나이에 그런 것을 바탕으로 제 삶의 방향을 정해야 겠구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게 사람의 삶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나 자신의 삶에 근본적으로 중요한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것이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말이죠.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도록 바라던 내일이다' 라는 말뜻도 그게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상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말씀이 큰 틀에서는 이해되지만,
그럼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극단적인 생각이겠지만, 의미 없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의미없는 삶에 전착하는지?
아니라면, 정체성이 확인되는 그 날에 이 땅의 삶은 과연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사실, 가장 두려운 것이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입니다.
한 사람이 사라져도 세상은 번듯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없는 세상이란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죽으서도 이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또 겨울은 찾아왔습니다.
계절이 우리를 찾아온 것인지, 우리가 추워져 겨울이 된 것인지......
그럼에도 이 아침 저에게 다가온 가장 큰 현실은 춥다는 것입니다.
날이 엄청 찹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