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신 글과 쓰시는 글 그리고 강의를 통해서 더디지만 재미있게 배우고 있습니다.
<신학공부> 강의와 더불어, 지금 읽고 있는 사도신경 해설(판넨베르크 저)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신학의 거장들이라는 천체 망원경을 통해 나안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아득하고 경이로운 우주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일에 <신학공부> 강의 시간에 질문했었는데,
궁금한 점이 있어 또 질문 남깁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우리는 부활한 예수의 현재적 현실성을 직접 목도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증언에 근거해서 다시 믿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사도신경 해설 142쪽).
그리고 누가복음의 승천 설화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행전의 승천 설화는 바울이 스스로 부활한 예수의 현현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과 충돌되는 것 아닌가요?
더군다나 부활이 시공에 한정되지 않는 새로운 생명이며 구원의 현실성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우리도 부활한 예수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정당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여기서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오감을 통한 경험을 일컫는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기독교와 성서의 예수 부활 사신을 매개로, 부활한 예수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는 않은지 궁금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누가-행전의 승천 설화가 말하는 것은
부활한 예수가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조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사도신경 해설 143쪽)기보다
죽은 자의 부활이 아직 보편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예수의 부활도 여전히 은폐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는 없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지난 8월 3일에 <신학공부> 강의가 끝나고 여쭈어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도들의 영성을 어느 정도 따라간다면, 부활하신 예수님 경험이 공생애 기간 예수님을 알던 제자들의 경험이나 바울의 경험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고 대답하신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던 중에 이 책을 읽고 다시금 궁금증이 생겨서 여쭈어 봅니다.
추운 겨울, 대림절의 평화가 가득하길 빕니다.
음, <신학공부>와 <판넨베르트의 사도신경해설>이 재미있다니
그런 현상 자체가 내게는 재미있소이다.
야소도락 군은 아무래도 평신도 신학자라도 되어야 할 것 같소.
질문과 자신의 대답을 함께 썼소.
다른 분들의 이해도 돕기 위해서
질문을 간단 명료하게 두 가지로 줄이겠소.
1) 사도들의 부활 경험이 오늘 우리에게 반복될 수 있느냐?
2) 판넨베르크는 왜 승천 전승을 통해서 그 반복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느냐?
이 두 질문 사이에 바울의 부활 경험이 놓여 있소.
이런 문제를 다 다루려면 '전승사연구'가 뒷바침 되어야 하니
그냥 간단하게 말합시다.
승천전승이 먼저인지 바울의 부활경험이 먼저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소.
당연히 이 두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에서 따로 전승되었을 거요.
그게 각각 신약성경 안에 들어온 것이오.
만약 승천 전승을 바울이 알았다면
자기의 부활 경험을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을 거요.
승천 전승은 부활 경험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교회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오.
오늘 우리는 사도들과 똑같은 차원에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할 수는 없소.
(야소도락에 의하면 그게 가능하다고 내가 대답했다고 하지만,
아마 당시에 다른 뉘앙스로 대답했을 것이오...)
그들은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이오.
모든 사람들이 그걸 직접 경험하는 순간이 종말이 아니겠소?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을 텐데,
혹시라도 다른 데서 좀더 정확한 것을 알게 되면
나에게도 알려주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