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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20)
내가 타고 있는 운명의 기차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예상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 답은 단순하다. 그리고 명백하다. 지금 내 삶의 무화(無化)를 준비하는 것이다. 지금 나와 연관된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그 사태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터널 밖과 터널 안은 모든 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다. 지금 내가 가치 있다고 보고 열심을 다해서 성취하려는 것들을 끊임없이 내려놓아야 한다. 목사로서의 정체성마저 거기에 포함된다. 당연하다. 터널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부터 목사가 아닌 상황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무화를 허무주의나 냉소주의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성서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 부정이다. 터널로 들어가면 자기 부정을 아무리 막아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게 지혜로운 삶이 아니겠는가. 자기부정으로 인해서 현재 삶의 에너지가 훼손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는 정반대다. 자기부정은 생명의 기운을 오히려 활기차게 한다. 이건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예수님이 공연히 자기를 부정하라고 말씀하셨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