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구원(3)
죽음을 통한 이 세상과의 단절은 바로 이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이며 구원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미련이 있다면 그는 죽음을 통해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미련을 끊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경험은 이런 미련을 오히려 강화시킨다. 목사들은 교회 성장에 미련이 크다. 은퇴할 때까지 거기에 매달린다. 자식 문제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미련이 크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다. 문제는 그런 미련이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강하다는 점이다. 죽어야만 이런 데서 해방 받을 것이다. 그런 것에 아무리 미련이 강한 사람도 죽으면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아등바등 대면서 수많은 미련, 또는 좋게 말해서 수많은 열정에 싸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살아있는 한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바울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죄의 능력이, 또는 율법의 능력이 너무 커서 우리가 죽어야만 해결된다고 말이다. 그게 인간의 숙명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게 우리를 파괴하는 힘이다. 죽어야만 그런 힘이 없어지니까 죽음이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으니까 살아있는 한 구원을 얻은 거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경험함으로써 현재적 구원도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런 경험들이 시시때때로 주어진다. 그것은 곧 죽을 때 일어날 모든 미련으로부터의 단절을 지금 살아있을 때 경험하는 것이다. 미련으로부터의 단절을 허무주의와 비슷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허무가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의 경우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다. 바울 식으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인식이자 경험이며 신앙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이 세상 모든 미련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또는 벗어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서 죽음의 문을 통과할 용기를 얻었다. 그가 종말론적 생명의 궁극적인 현실(ultimate reality of eschatological life)로 제자들에게 현현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나는 인간의 모든 상상력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주어질 생명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용기와 희망이 구원 아니겠는가.
목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살면서 무언가 꾸준히 했던것이 - 더군다나 읽기를 - 잘 없었는데
어느덧 여기까지 왔네요...
전엔 무언가를 시작하고 의욕이 과다해서 또는 조바심때문에 금새 포기하고 놓치는 경우가
참 많았었는데 목사님께서 종종 쓰시는 "천천히 가봅시다"라는 댓글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고 또 1년간 몸소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많을 것을 단시간에 얻고 싶은 욕심이 솟구칠때도,
난 왜 이거 밖에 안되지 하는 좌절도 많지만
천천히 가다보면 어느새 변화될거라는 확신과 기대가 듭니다.
15년에도 참된 안식과 참자유의 길로 인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시고 평안하십시오.
목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