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에 몸 던진 기생 기화에 대한 혜관 승려의 한 자락 생각을 박경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빼어난 묘사력이다.
다 같은 강물이요 다 같은 뗏목인데 혜관은 섬진강과 해란강이 왜 다를까 생각한다. 아름답기론 섬진강 편이다. 조촐한 여자같이, 청아한 소복의 과부같이. 백사는 또 얼마나 청결하였는가. 산간의 강물과 대륙의 강물, 모두 숱한 사연을 흘려보낸 강물. 혜관은 섬진강에 몸을 던진 기화를 생각한다. 십칠팔 년 전에 처음 이곳에 동행하여 왔을 때 법단 남치마에 옥색 두루마기 미색 목도리를 둘렀던 아름다운 기생 기화의 모습이 뚜렷하게 강물 위에 떠오른다.
“나무아미타아불, 나무관세움보살.”
변발한 청인을 보고 머리를 반쯤 깎았으니 반 중이 아니겠느냐 했을 때 끼루룩 웃던 기화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다. 살가죽이 늘어지고 이빨은 모조리 거덜이 나서 성한 것이라곤 앞이빨뿐인데, 육십을 넘은 몸이, 인간과의 인연을 버린 몸이, 벼랑의 꽃 같은 여자, 이제는 섬진강 푸른 물에 넋을 버린 여자, 그 여자를 중생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혜관. 괴물 같은 혜관의 마음속에 엷은 한 같은 것이 솟는다. 최서희의 일생이 간도로 떠난 후 홀로 남아서 절로 은신해왔었던 꽃다운 처녀 봉순, 절 마당을 왔다 갔다 하던 그 자태에 젊은 사미승들은 오뇌의 밤을 보내야 했었고 중년이던 혜관마저 남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봉순이는 기화가 되었고 노류장화, 그러나 출가한 중에게는 여전히 꺾지 못할 벼랑의 꽃이었다.
혜관은 한순간 해란강 강물 위에 진분홍 복사꽃, 흩어진 꽃이파리가 떠내려가고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나무관세음보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반야적정(般若寂靜), 찰나에 생멸하고 떠나서 또다시 크게 사멸전변(死滅轉變)함을 피할 수 없나니, 여하한 곳에도 고정 존속하는 내가 있을 수 없으며 주재자(主宰者)도 없느니라. 번뇌 떠난 곳에 빛이 오나니 그것이 반야로다. 시끄러운 번뇌의 동요가 멎을 때 그것이 적정...... 번뇌의 속박을 떠나 대자재(大自在)에 이르면 그것이 불보살이 아니고 무엇이랴.’(12권 110, 111쪽)
토지를 꼭 읽고 싶었는데 방대한 분량에 아직 시작을 못했습니다
청도 어린이 도서관의 책꽂이에 턱하니 꽂혀 있는 토지에 마음이 솔렸습니다만 급한 책이 있어 빌려오지못했는데 목사님의 안내를 따라 꼭 읽어 볼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 윌두란트의 '문명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다 읽고 나면 문명에 대해 일가견이 생길지 기대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