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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소천하신 한국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고 이종성 박사님의 글 중에서 좋은 내용이 있어서 그대로 옮겨 옵니다.
이종성 박사님은 '걸어다니는 신학의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이 있으실 정도로
방대한 기독교 신학을 섭렵하시고 세계의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직접 다 만나시고 그들과 계속 교류를 하신 분이시고 수많은 목회자들을 길러 내신 분입니다.
이 박사님의 글 중에 "통전적 신학 서설"이라는 좋은 글을 여기에 옮기는데요.
박사님께서 자신의 신학을 '통전적 신학'이라고 말씀하셨죠.
이종성 박사님의 신학적 업적을 후배 신학자 분들과 목회자 분들이 잘 계승하면 참 좋겠습니다.
'통전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면 대충 파악이 되실 것입니다.
긴 글이라 다 옮기지는 못하고 일부 내용만 옮깁니다. ^^
- 통전적 신학 서설 -
(이 글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명칭을 신이라는 말을 쓸 것이나 삼위일체에 관한 설명에 있어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쓸 것이다.)
(앞 부분 생략)
구미 신학의 문제점
(기독교 신학이 5세기부터 유럽에 정착되고 발전되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 미국 신학이 이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조류를 총칭하여 구미 신학이라고 한다.)
구미 신학이 성서를 통하여 계시된 삼위일체 신에 대하여 많은 이단사설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신관을 수호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일에 공을 세운 많은 신학자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구미 신학의 전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몇 가지 미흡한 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신의 통치 범위를 제한했다. 신은 우주와 전 인류를 통치하시는 절대적인 신인데도 불구하고, 구미 신학은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과 유럽 지역의 인류와 문명만을 취급하는 데 급급했다. 그렇게 함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북남미는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다.
둘째, 따라서 타종교와 유색인종과 그들이 착안하고 개발한 종교와 윤리와 문화는 신학적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셋째, 기독교는 20세기까지 교회가 중심이 되어 연구되고 체계화되고 확장되고 신학이 개발되었으나 다른 종족이 개발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종교, 예를 들면 힌두교, 불교, 유교, 회교 등은 이단종교로서 비판의 대상으로만 취급되었다. 그러한 대상을 복음의 준비 과정(prepa-ratio evangelica 프레파라치오 에반젤리카)으로 초대교회가 인정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가 기독교를 장악한 이래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신의 선교(Missio Dei) 사상이 등장할 때까지 타민족의 종교와 문화의 유가치성이 경시되었다.
넷째, 유색인종에 대한 몰이해가 계속되었다. 백인종 외에는 백인들의 침략과 지배의 대상이 되었을 뿐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의 동등한 시민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섯째, 피조계를 단지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창세기 1:26 - 28이 그들의 성서적 근거가 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의 확장사는 기독교가 타종교와 타문화를 정복과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역사였다. 이러한 현실을 구미 신학은 지금까지 지지하고 있다.
여섯째, 인류역사관에 있어서 백인의 역사관을 성화시키고 있다. 2001년의 통계에 의하면 전 인류 60억 중에 기독교의 총수는 약 20억이라고 한다. 백인이 중심이 된 기독교와 유대교 외의 종교의 실세는 기독교의 수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힌두교(8억)와 이슬람교(12억)와 불교(3억 6천)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아프리카와 동남아와 중남미에 있는 기타 종교의 수도 5억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 때까지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종교와 이들의 문명을 단지 선교의 대상으로만 취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의 구미 신학은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외의 종교와 문화와 문명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준비적 위치에 있었음을 부인하고 단지 기독교 문명의 침략과 지배의 대상으로만 이해하므로 의로우시고 사랑이신 야웨 신의 구속적 통치권을 곡해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곡해 위에 기독교 신학을 개발하고 조직하고 확산시켜 왔다. 구미 신학이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은 복음주의파나 보수파나 자유파를 막론하고 구미 신학을 잘못된 부분까지도 수용하여 잘못된 내용을 그대로 전수하고 수용하고 확산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대하여 최근에 토착화 신학 또는 종교 간의 대화라는 이름으로 개혁을 시도했으나, 일률적으로 혼합주의에 빠지게 됨을 보았다. 필자는 이 시점에 있어서 그 상황을 좌시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가장 성서적이고 복음적이고 보편타당한 신학을 개발해야 할 사명감을 느끼게 되어 통전적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일을 추진하고 있다.
(중략)
맺는 말
필자는 위에서 장차 개발될 통전적 신학의 프로레고메나를 간략하게 적어 보았다. 그 내용을 다시 요약해서 말한다면 통전적 신학의 대전제로서 야웨 신이 서양인과 지구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와 모든 생물과 우주 전체를 주관하신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전제 하에 신론, 구원관, 성령관, 교회관, 윤리관 그리고 종말관을 재검토해야 한다. 통전적 신학과 유사한 시도가 과거에도 시도되었다. 그것은 종교철학자들이 시도한 혼합주의다. 통전적 신학이 혼합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전자가 모든 종교나 문명 안에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요소를 취사선택하여 범종교적이고 범문명적이고 범도덕적인 종교신학을 형성하려는 데 있다고 한다면, 통전적 신학은 천지만물을 지배하는 야웨 하나님을 절대신으로 믿고, 그 신의 통치 하에 여러 종교와 문명과 문화가 있으며, 그것들이 야웨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보조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통전적 신학은 인류가 개발한 이러한 모든 종교와 학문과 기술과 문명과 철학과 도덕을 야웨 하나님의 통치권 안으로 수용하여 성서를 통하여 계시된 진리의 보조자로서 평가하여 인류 전체를 위한 통전적 메시지를 추구한다. 따라서 통전적 신학은 타종교나 타문명을 일률적으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것들 안에 있는 좋은 자료는 성서적 복음주의로써 여과시켜 통전적으로 신학 작업의 자료로 삼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통전적 신학은 구미 교회가 발전시킨 소위 기독교 신학처럼 기독교 외의 다른 문화적 업적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거나 타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다같이 절대자이신 야웨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의 통치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기독교 신학에 봉사하는 의의(preparatio theologia)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전적 신학/ 이종성, 김명용, 윤철호, 현요한/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위의 글은 이종성 박사님 글의 전문이 아니라 그 중에서 일부 내용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윗글의 앞 부분과 중간중간에 그 외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통전적 신학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 내용만 옮겼습니다.
마지막으로, 참고하시라고 이종성 박사님의 글 "통전적 신학 서설"의 차례를 적어 드립니다. ^^
통전적 신학 서설
Ⅰ. 신학의 본질적 실체와 비판
1. 구미 신학의 본질적 실체와 그에 대한 비판
1) 신학의 대전제: 신에 대한 통전적 이해
2) 성서적이고 복음적 신관이 확정되기까지의 과정
3) 구미 신학의 문제점
2. 신학의 대전제
1) 신의 통전적 실체
2) 신의 통전적 사역
3) 신 앞에서의 시간과 공간
3. 종교개혁 때까지의 구미 신학의 공과
1) 공적
2) 과실
(1) 신학의 그레코-로만화(Greco-Romanization)
(2) 신학의 백인종의 시녀화
(3) 신학과 휴머니즘의 타협
(4) 타종교에 대한 몰이해
4. 반복된 개혁의 시도
1) 정통파와 헬라파의 갈등
2) 아우구스티누스의 공과
3) 토마스 아퀴나스의 타락
4)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
5) 근대 신학의 공과
6) 바르트 신학의 공과
(1) 바르트의 공적
긍정적 면
부정적 면
7) 서구 신학의 종착점: 포스트모더니즘
Ⅱ. 통전적 신학의 과제
1. 삼위일체 신
2. 구원관
3. 성령관
4. 교회관
5. 윤리관
6. 종말관
맺는 말
르네상스 님은 이종성 박사님 신학을 좋아하는가 보군요.
저도 학부 때인지 대학원 때인지 모르겠지만
그분이 우리 신학대학에 출강 오셨을 때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