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 말한다. 가족들과 일상에 대해서 말하고, 테니스 동호회원들과 테니스에 대해서 말하고, 신학생들에게 신학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청중들에게 설교한다. 이게 모두 말이다. 나를 표현하기도 하고, 진리를 전하기도 하고, 큰 의미 없는 말을 하기도 한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지는 못한다. 옹알이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말의 세계를 경험한다. 물리적으로는 호흡이 있고, 성대가 작용해야 말이 나온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말이 없는 시기가 있었다. 직립 이후로 성대가 발달하고 뇌의 용량이 늘어나면서 말이 유인원들에게 하나의 사건으로 들어온 것이다.
말을 의사교환이라고만 본다면 다른 동물들에게도 말이 있긴 하다. 침팬지도 자기들끼리 소리와 몸짓으로 의사교환을 한다.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의 말은 동물들의 그런 소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람만이 개념적인 말을 할 줄 안다. ‘나는 배고프다.’는 의사표시를 코끼리는 할 줄 안다. 그러나 ‘도가도 비상도’라는 말을 할 줄 모른다. 그 세계를 모른다. 말의 존재론적 능력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나는 말을 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목사가 된 후에 평생 설교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낸 셈이다. 그건 피할 수 없는 나의 숙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나는 말을 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사실은 요즘도 하나님을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한다. 숨이 끊어져 더 이상 말이 불가능한 그 순간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말을 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 정확하게는 다른 방식의 말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나무, 흙, 산, 나비, 거미, 대나무와 대화가 가능한 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말을 배우려면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말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옛 스승들은 묵언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묵언이 곧 새로운 말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리라. 나는 지금 현실의 말에 기대 있으면서 궁극의 말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별로 없는 원당에서!